매일 에세이

베다니 마을의 마르다와 마리아

무주이장 2018. 7. 24. 16:11

베다니의 마리아 와 마르다.


 주일 설교를 듣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다른 날과 달리 둘째가 함께 교회를 다녀오는 중이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이 아니면 우리와 말을 잘 섞지 않는 둘째는 뒷좌석에서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우리 세 명의 고요가 어색한 듯 아내가 말을 했습니다.

“오늘 설교 좋죠?”

“응. 좋았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요한복음 12장 1~8절이었고 ‘참된 보배 향유 옥합’이란 제목이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로 다시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이 지났음에도 다시 살리신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고 마르다는 열심히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잔치집은 왁자지껄 분위기가 들떠있습니다. 이때 삼백 데나리온에 이르는 가치를 지닌 나드 한 근을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당시 장골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 쓴 나드 한 근은 어른의 일 년 품삯에 이르는 비싼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가룟 유다가 비판을 합니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나은데 왜 그러지 않았냐고 말입니다. 아마 유다는 이때 재정을 담당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의 헌금이 들어오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면서 자기도 콩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죠. 이를 예수님이 아시고 하신 말씀이 6절입니다.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니라” 그러면서 마리아의 행동을 두둔하십니다. 7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목사님은 짐작컨대 마리아가 가진 전 재산을 팔아 준비한 나드 한 근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것은 며칠 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예수님을 위한 행동이라고 하십니다. 참된 보배는 돈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셔 대신 속죄하게 하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까지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을 위해 옥합 속의 향유를 아낌없이 쏟는 마리아의 행위가 참된 보배라는 것입니다.


 이상이 목사님의 설교내용입니다. 정말 좋은 설교 말씀이죠?

그런데 제게는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을 알 수 있었냐는 의문이 일었습니다. 예수님이 미리 알려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7절에서 자신의 장례할 날을 예언하셨으나 주위의 누구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알려주었을까요? 성령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죽음을 알게 했다면 성경에서는 그에 관한 기록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님이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무리한 해석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왜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봐?” 아내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혹 성령?


 마리아는 성격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고야 마는 성격인 것 같습니다. 주위의 시선이나 눈치쯤이야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대담성이 있는 성격입니다. 그렇다고 악의가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천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그의 언니 마르다는 책임감이 강하여 주어진 일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려는 성품이면서 주위의 시선을 많이 의식합니다. 자연히 예의가 바른 사람입니다. 이 두 자매가 예수님을 대접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대하고는 잔치상을 차리는 등 일을 하느라 바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나드 한 근을 사서는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것으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천성이 다르고 은사가 달라서 생긴 다른 점이라는 것이 제가 이해한 저들 자매입니다.


 아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자기의 행동에 대한 보답을 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마리아는 어떤 보답도 원하지 않는 감사의 마음을 전한 것이기에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비판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갑자기 뒤에서 끼어들었습니다. 자기는 아빠와 생각이 같다. 마리아는 밉쌍이다. 언니가 일을 하고 있으면 도와주고 난 후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해도 될 텐데 그러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밉다는 것이 아이의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떻게 나의 생각이 자기의 생각과 같다고 알았을까요? 또 성령?


 “예수님이 마르다도 사랑했는데?” 아내가 아이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말 습관이 항상 예수님과 같은 성결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면서 인간적인 결론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전에도 마리아와 마르다를 얘기한 적이 있는데 엄마와 자기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엄마의 말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바른도덕 책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찾았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길을 가던 예수님 일행을 초대하고 영접한 여인이 있습니다(38절) 마르다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로 바삐 부엌일을 하는데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는 언니를 도울 생각은 않고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만 있습니다(39절) 언니는 너무 바쁜 나머지 마음이 어지럽고 일은 정리가 되지 않아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40절)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동생 마리아를 직접 부르지 않고 예수님께 요청하는 것으로 봐서 마르다의 예의범절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니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 하시며 마르다의 부탁을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서 뭔가 불편한 게 생긴 것 같습니다. 마치 마르다의 요청이 잘못된 것이라고 꾸중하시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음식 초대도 고맙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도 좋게 보신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 하듯이 마리아는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니 각자 좋아하는 것으로 하라는 말씀이었고, 마르다의 일이 많아진 것은 손님들께 맛있는 음식을 많이 대접하려는 때문이니 음식을 한두 가지 만으로 줄이라는 요청을 하십니다.


 이미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을 굶은 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며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은사가 그것이라는 것을 알면 마리아를 미워할 이유는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장면을 목격한 우리들의 눈에 마리아가 밉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수도 있긴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1절~44절까지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한 번 더 봅시다.

두 자매는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자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합니다(3절)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병의 이유를 아시고는 이틀을 더 계시던 곳에 유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요청을 무시한 이유가 있어서이지 두 자매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알려주십니다. 당시 유대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오리 쯤 떨어진 베다니를 향해 가십니다(7절) 제자들이 반대함에도 예수님은 나사로를 깨우기 위해 출발하시고(11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격려하여 예수님을 동행합니다(16절)


 베다니의 추모객들이 나사로의 집에 몰려와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에 마르다는 천성대로 곧 나가 맞이하지만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을 자기의 청에 대한 거절로 오해한 마리아는 집에 앉았습니다(20절) 아니 어쩌면 오라비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다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원래 자기 감정에 몰입하는 천성을 가졌으니까요. 예수님을 뵌 마르다가 원망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원망과 안타까움 등의 마음조차도 예수님 안에서 마음대로 표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마르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믿음이 강한 자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마르다의 믿음에 예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고 화답을 하십니다. 믿음과 대답이 부응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에 대한 응답은 천국과 영생의 사후세계를 보장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며 오빠의 현실적 죽음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며 마르다의 믿음에 확신을 부어주시니 마르다는 이를 긍정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믿음을 좋게 보시고 그 믿음에 확신을 더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한 번도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부르신다 하니(28절) 죽은 오빠 나사로 생각에 빠져 있던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갑니다(29절) 예수께로 나아간 마리아는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절) 역시 마리아도 펑펑 울면서 원망의 말부터 터뜨립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울음과 그것을 보고 같이 우는 유대인들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같이 우시면서 나사로를 둔 곳을 묻고 가십니다(33~35절)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들 남매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에게 나사로를 살려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하나님이 말씀을 들으시고 이를 허락한 것을 감사하면서 이는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둘러선 무리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면서 죽은 나사로에게 명령하십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는 염으로 쓴 베에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었습니다(40~44절)



 이로써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 남매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미움을 받을 것도 마르다가 책망을 받을 일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사건의 당사자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추리하면서 상황을 이해하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재미도 있고 유익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 교재로 추천할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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