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간행 8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김현아 지음. 창비 간행

책의 제목부터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가슴속에서 뛰던 심장이 조여지며 쿵쿵 불규칙적으로 뛰면서 아픕니다. 옆집의 아이가 아니라, 친척 집의 아이가 아니라, 그토록 귀엽고 예뻐서 사랑받던 딸이 조용히 무너진 것을 확인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슴은 무너집니다.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를 앓는 딸을 보살피는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의사 부부의 둘째 딸로 태어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아이가, 부족함이 없을 듯한 아이가 아픈 것을 확인한 어머니는 딸을 돌봅니다. 딸을 돌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뜨겁지만 말과 행동은 냉정합니다. 책을 읽던 중 저의 첫 반응은 아픈 딸을 대하는 어머니가 너무 냉정해 놀랐습니다. 하지만 곧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고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뜨거운 가슴보다는 찬 머리를 가져야 조용히..

매일 에세이 2024.04.25

레몬. 권여선 장편소설. 창비 간행

서로가 서로를 베는 사랑 이야기 엄마는 미쳤을 것입니다. 너무나 예뻐 자신이 낳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엄마는 미쳤을 것입니다. 19년을 곁에 두고 애중중지 키운 딸이 공원 한 구석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엄마는 미쳤던 것이 분명합니다. 언니가 밝은 해라면 언니의 그림자로 살았던 그래서 너무나 황홀했던 동생도 미쳤습니다. 누가 범인인지 알 수가 없다며 증거가 없다는 경찰의 말에 동생은 미쳤을 것입니다. 언니가 없는 동생은 존재 의미를 잃었습니다. 엄마와 동생은 언니를 잊기로 했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동생은 엄마에게 언니를 되찾아주려고 성형을 합니다. 엄마는 잃어버린 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딸의 성형을 성원합니다. 예쁜 언니가 되어 엄마를 위로하려는 동생은 말라갑니..

매일 에세이 2023.06.27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시집. 창비 간행

저는 시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별 재미를 못 느끼니 잘 읽지 않습니다. 최근 마을 도서관에 들러 시집을 몇 권 빌렸습니다. 같이 동행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집은 금방 읽어서 사기가 좀 그래” 아내의 대답은 저와 반대였습니다. “시집은 두고두고 계속 읽으니 사서 읽어. 난 소설 사기가 그렇던데” 그동안 여기저기서 귀동냥하여 알아 둔 시집 몇 권을 빌렸습니다.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먼저 폈습니다. 시가 왜 이리 우울하고 슬픕니까? 그에게 어떤 슬픈 일이 많아서 시가 이리도 슬픈지 그의 프로필을 검색합니다. 1986년생입니다. 37살의 시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창비 블로그에서 안 시인과의 인터뷰를 확인했습니다. 시인을 소개하는 글에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매일 에세이 2023.05.24

엄마의 이름. 권여선 소설, 박재인 그림. 창비 간행

무엇이든지 참아야 하는 사람. 많이 참았던 사람. 그래서 많이 아픈 사람. 혹시라도 조금 편해지나 싶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도 미안해하는 사람. 자식에게는 한없이 지기만 하는 사람. 우리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어머니도 요즘은 많이 소환됩니다. 아이를 아프게 하는 사람. 남편을 외롭게 하는 사람. 자기만 아는 사람. 정 반대의 어머니가 소환되는 것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세상 어떤 사람도 한편으로만 편향된 그런 캐릭터를 가지지는 않잖아요? 여기 어디 중간쯤에 제가 아는 어머니, 그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어머니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숙 씨와 춘영 씨의 딸로 태어난 반희 씨는 두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다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핑계로 두 사람에게서 도망..

매일 에세이 2023.03.21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연작소설, 창비 간행

처음에는… 젊은 친구 특유의 글쓰기로만 생각했습니다. 글에 유머가 있고, 생각에 탄성이 있는 것으로 좋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 것은 몇 쪽을 넘기지 않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간힘을 쓰며 살았던 습관이 보였고, 그가 애썼던 노력이 힘을 잃기 시작하자 용기를 내어 다시 있는 힘을 다 짜내며 만들어낸 글의 탄성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작품을 잃는 내내 연작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렇다고 뭘 알아서, 공감을 해서, 충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던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막막해서,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느낀 아픔입니다. 재희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 우럭 한점으로 우주의 맛을 알았던 이야기,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만난 사랑이야기는 이국땅 태국에서 늦은 우기의 바캉스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매일 에세이 2023.03.07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소설집. 창비 간행

책을 펼치자마자 ‘안녕 주정뱅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찾았다. 소설집의 제목은 보통 작가의 소설 중 하나를 표지에 옮기는 것으로 여겼는데, 어제 읽었던 ‘아직 멀었다는 말’과 같이 한 책에 모은 소설들을 관통하는 의미를 담은 듯했다. 술을 먹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다. ‘봄밤’의 영경은 이혼 후 양육권을 가진 아이를 시댁에 빼앗기고 마시기 시작한 술에 의해 알코올중독과 간경화, 심각한 영양실조를 얻었다.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술에 대한 집착으로 결국은 알코올성치매에 빠진다. ‘삼인행’의 주란과 규 부부와 같이 여행을 간 훈은 숙소에서 햄버거를 안주로 술을 먹는다. 여행에서 돌아가는 길에서는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중에 식당에 들러 소주를 마신다. 집에 다시는 돌아가..

매일 에세이 2023.01.19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서울편 2. 유홍준 지음, 창비 간행 1.

역사는 반복된다? 서울편 1을 읽은 후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이 5대 궁궐이었다는 설명에 깜짝 놀라 경복궁과 덕수궁만 다녀온 것을 알고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찾아 을지로에서부터 걸어서 찾아갔습니다. 궁궐 담(사실은 종묘의 담이었습니다)을 따라 걷다 결국 다시 인사동 초입 맞은 편의 창경궁 홍화문을 확인하고는 늘 지나가며 보던 곳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을지로에서 곧장 직선으로 오지 못하고, 종묘 쪽으로 가서는 뱅글뱅글 돌아오면서 갑자기 든 생각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 그것도 곧장 재방송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잊을 만하면 다시 재생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는 오늘에 재생되는 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르니 빙빙 돌아 한참을 헤매다 온 것이지요. 역사 공부는 오늘을 살기 위한 방편이라고 믿습..

매일 에세이 2023.01.11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간행 1.

새로울 것 없을 것 같은 세상 이야기들. 많은 작가들은 ‘창작의 고통’을 얘기합니다. 창작물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다는 얘기일 터입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사 모든 이야기는 새로운 게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어떤 이야기에 다른 경험담이 겹치고, 그래서 얼핏 새로워 보이지만 비유하자면 기존의 이야기를 편곡하거나 변주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이런 편곡이나 변주가 쉽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중구난방 언어를 연결한다고 해서 이야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언어에 대한 개념이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아’와 ‘..

매일 에세이 2023.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