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5

하얼빈, 김훈 지음. 문학동네 1

초라한 먹물들. 지워진 기억 속의 이 씨 왕가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어느 줄에 서야 목숨을 부지하고 나아가 부귀와 영광을 가질 것인지 골몰하였지요. 나라의 임금이 황제가 되었다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붙이는 것도 허황한 짓이었습니다. 만약 임금과 신하들이 겉으로는 힘에 굴복하면서도, 뒤로는 항쟁과 독립을 위한 지원을 했더라면, 국권은 회복이 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추억으로 그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고, 아관으로 파천을 하는 일들이 무지막지한 일본에 대한 항쟁으로 기록되는 것이 황탄한 말이고 황잡한 말입니다. 말은 시간을 넘어 건너가지 못하고 책 속에서 ..

매일 에세이 2023.05.04

공터에서, 김훈 장편소설, 해냄 출간

공터에서, 김훈 장편소설, 해냄 출간 김훈 선생의 글에서는 수고가 느껴집니다. 감정의 현을 건드리는 글들에서 활줄로 연주하는 것처럼 정성스럽고 정확한 음을 내려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연주되는 이야기들이 화려하거나 수다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다를 줄이려는 노력에서 감정은 더욱 증폭되고 함부로 뭐라 말할 수 없게 합니다.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니 독자라는 이유로 어찌 수다를 떨 수 있겠습니까. 글쟁이가 글을 억제한다는 것이 마치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 같을진대, 독자 또한 글을 읽는 동안 숨 쉬기가 쉽지 않습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선뜻 넘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문장마다 인물들의 신산한 삶이 느껴져 종이 한 장의 무게가 침 묻은 손가락으로 넘기기에 버거웠습니다...

매일 에세이 2022.07.05

저만치 혼자서, 김훈 소설, 문학동네 중에서 ‘저녁 내기 장기’

저녁 내기 장기 ‘1947년생이면 68이란다. 지금은 76이겠다.’ 이춘갑이 68이든 76이든 이춘갑의 인생이 별다른 게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시큰둥하다는 표현이 그럴듯한 지, 아님 무던하다고 해야 하는지 조금 생각하게 합니다. 이춘갑이 과거와 현재를 둘러보고 얼마 남지 않은 미래까지 고개 한 번 돌리듯 쉽게 일별하는 모습에서 저는 인생의 경륜을 봅니다. 경륜이라고 하면 대통령이라고 뽑았더니 바보짓을 하는 덜 떨어진 경륜이 아니라 인생의 지름과 둘레를 말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개방된 북악산을 올랐더랬습니다. 서울의 중심지고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선지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맞은편에서 오던 젊은 처자 넷이 두런두런 말을 이으며 오고 있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말이 아가미에 산소가 걸리듯이..

매일 에세이 2022.06.30

저만치 혼자서, 김훈 소설, 문학동네 중에서 ‘손’

손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후배랑 같이 부산 금강원 동물원을 갔습니다. 그 시절 그래도 금강원 동물원이 제법 유명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물개 우리가 있고, 하루에 몇 번 먹이를 주는 조련사에 의해 쇼를 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후배와 같이 핫도그를 하나씩 입에 물고 지나가다 들른 곳이 원숭이 우리였습니다. 사람이 오면 울타리 쪽으로 다가와 먹이를 원하는 것이 눈망울에 소망이 가득했습니다. 먹다 반쯤 남은 핫도그를 손잡이 쪽으로 건넸습니다. 원숭이의 손이 핫도그의 손잡이를 잡을 때, 손아귀가 막대기를 빈틈없이 쥐고, 당기는 힘의 절실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원숭이의 손은 사람의 손과 다름없었습니다. 핫도그를 쥐는 원숭이의 손과 후배의 손을 잡고 싶은 나의 손은 똑같이 갈망의 도구였습니다. 철호에게 강..

매일 에세이 2022.06.28

저만치 혼자서, 김훈 소설, 문학동네 중에서 '명태와 고래'

명태와 고래 1. 이춘개 사건 개황 원적이 강원도 어래진인 이춘개는 1950년 원적지 어래진에서 강원도 향일포로 피난을 하여 정착한 이주민이다. 이춘개의 소유인 서른 자짜리 연안 자망 어선인 ‘어래호’의 선주, 선장으로서 향일포에서 조업을 하는 자로 일상미상의 어느 날, 오후 3시께 향일포를 떠나 명태를 건지러 나간 후, 다음 날 새벽 어래진으로 들어간 자이다. 어래호의 선원은 이춘개를 포함해 모두 4명으로 1차 심문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다 음 가. 어래호는 낡은 배로 엔진은 도요타 2기통 엔진을 장착했다. 나. 조업 당일은 늦은 오후부터 안개가 걷혀 시야는 양호했다. 다. 자정이 지나 조류가 세어지고, 새벽에 북동풍이 불어 조류가 북쪽으로 돌아섰다. 엔지의 힘으로 조류를 이기지 못했다. 라. 북쪽에..

매일 에세이 2022.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