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공항철도. 최영미 시집. 이미출판사 간행

무주이장 2025. 2. 18. 15:55

 중학교 시절 시를 배웠던 국어시간은 낱말풀이 같았습니다. 당시 느꼈던 시적 감흥은 기억에 없습니다. 시를 배울 때면 작가는 몇 년에 태어나 어디에서 수학했고 어떤 시집을 냈으며 그의 시풍은 어떻고 그런 시풍을 알 수 있는 시어는 이런 것들이고 그래서 시험에는 무엇이 나올 것인지 교과서에 실린 시 곁에 빼곡히 적었던 것만 기억합니다. 가르치는 선생은 무슨 감흥이 저리도 많은 지, 감탄사가 연이어 나오는데, 도대체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시의 세계는 나이 들어도 방문하기 힘들 것 같은 어려운 이웃이었습니다.

 

 저는 쉬운 시를 좋아합니다. 철학과 신학 등 형이상학적인 시어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많습니다. 그러니 풍경화 같은 시가 좋습니다. 조금 더 나가면 마음속의 그림, 심상을 쉽게 쓴 시가 좋습니다. 시인을 좋아하기보다는 화가를 더 좋아합니다. 시를 설명하는 평론가보다는 그림을 설명하는 미학자가 더 좋습니다. 시인 최영미는 서향화를 전공한 시인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그림 같습니다. 부조리와 싸우는 시는 혁명을 그린 그림 같고, 마음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시는 인물화를 보는 기분입니다. 풍경화 같은 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시를 그림 보듯 할 수 있어 그냥 제 혼자의 감흥에 젖을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그의 시에 공감하면서 금방 읽었습니다. 시인은 재미없는 시집을 읽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읽는데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중에서)라지만 그림집 같은 시집은 재미 가득합니다.

 

잃어버린 너

내 손에 묻은 타인의 지문을 물로 흘려보낸다

흔적 없이 씻겨나간 흉터와 무늬

뜬구름 같은 비누거품만 아름다웠지

 

비 온 다음 날, 뺨에 닿은 아침 공기

차갑고 상쾌한

실연의 맛

 

화장실의 거울에 실연한 얼굴이 차갑고 상쾌하게 비치는 것 같습니다. 거울이 쨍하고 깨질지도 모릅니다. 슬퍼서 아름다운 것도 있지요. 실연의 맛은 끈질깁니다.

 

젊은 남자

광화문에서 헤어진 적은 없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널 놓아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잖아 (중략)

 

시끄러운 확성기를 피해

순두부집으로 가려다 길을 잃고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섰다

너를 닮은 원룸들

너의 원룸 현관을 장식했던 향수병들 (중략)

 

너는 지금도 내 신발장 속에 있어

Poesie, 나 안 버렸거든

다 쓰지도 않고 버릴 순 없잖아

 

 헤어지더라도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좁은 곳에서 헤어지고, 유혹하려고 디오르 향수 Addict를 사려다 Poesie를 골랐습니다. 잔향이 은은하고, 오래 갈 것 같아서. 너 없는 내 신발장에는 버리지 못한 향수가 그대로 있습니다. 신발장 속 향수 그림. 마음을 그린 그림으로서는 최고입니다. 덩달아 산수화 한 편 보고 가겠습니다.

 

산수화

자연도 사람이 들어가야 살아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풍경 속에 들어가

음풍농월

바위에 엎드린 늙은이

 

미술관 유리를 뚫고 나온 바람

 

 오늘 이웃 마을 식당을 다녀오며 맞은 찬바람이 그대로 옷깃 속으로 들어오는 듯합니다. 바람도 그릴 수 있는 시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렵게 시를 쓰는 것 같지 않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문득 솟아오는 문장을 잡으려 수첩을 꺼내지도 않”(어떤 죽음 중에서)고 시어를 찾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체득했을까 궁금합니다. 그가 준 팁입니다.

 

최후진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진실을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