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아기 동물’이라는 말 왜 불편할까요(시사in894호). 최태규(수의사)

무주이장 2024. 11. 8. 11:58

 이 글을 쓴 최태규 수의사(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활동가)는 반려동물의 지위가 사람과 동격까지 올라서 대충 아기아이든 그렇게 불러도 크게 틀어진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 말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엄연히 다 자란 개는 강아지가 아님에도 개라 부르지 못하고 강아지로 왜 불리는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혹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 갇혀 여성주의적 돌봄 관점으로동물을 보지 않으려는 것은 아닌가 자기 검열(변명)을 합니다. 더 나아가 옹이처럼 박힌 남근중심주의라는 장황한 단어도 사용했습니다. 앞의 자기 검열은 이해가 되었지만, 뒤의 표현은 과유불급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칼럼의 요지는 개를 강아지라 부르며 돌보는 사람들의 폭력성과 그 대상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예를 들면 개만 해도 인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동물인데 번쩍 안아 들고 연신 뽀뽀를 퍼붓는 인간의 돌봄이 개에게는 짜증이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십 년쯤 같이 지내며 인간의 뽀뽀에 대해 온몸에 힘을 빼고 체념하는 방법을 익혔거나 설령 애정표현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뽀뽀하는 인간의 마음은 개에게 온전히 가닿기보다는 참아야 하는 인간의 폭거로 남는다. 인간은 그러다 입술을 물리고는 당황한다. 개도 물고서 당황한다.”

 

 저런 폭거를 수없이 저지른 저는 비록 물리지는 않았지만 머리를 돌리고 저를 피하던 삼식이가 기억이 났습니다. 술 냄새를 풍기며 곁에 붙었던 게 얼마나 싫었을까 생각하면 더욱 미안한 마음입니다. 저를 믿지 못하고 하산길에 만난 동네 개들이 짖어대자 꼼짝 못하고 얼어붙은 삼식이에게 화를 내고 씩씩거린 기억도 났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아내는 개도 이해 못 한다며 실소를 보냈습니다. 개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미안함과 함께 무지개다리 너머에서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저는 다 큰 개를 강아지라 부르진 않습니다. 집 안에서 키우는 것도 아직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의 성대를 인위적으로 제거하고, 예쁘지 않다고 꼬리를 일부러 자르는 것도 반대합니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개를 기르면서 아이들은 사람이 먹는 음식을 주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저는 밥을 먹을 때 곁에서 저를 쳐다보는 삼식이에게 제가 먹는 음식을 나눴습니다. 제가 주는 음식과 사료 중 삼식이가 좋아하는 것을 먹게 했습니다. 너무 많이 줘서 탈이 나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음식이 잘 못 된 것이 아니라 과식이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 변에서 냄새가 심하게 난다 거나 죽을 때 고통이 심하다는 주장을 듣기는 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막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칼럼의 결론입니다. “돌봄은 대체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적어도 사랑하려는 의지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돌봄의 주체가 폭력적이라고 인지해도 스스로를 용서해 버린다. 어차피 그들을 다 알 수 없다는 포기와 타자화가 아기인 동물을 구성한다.”

 

 제가 삼식이에게 보였던 폭력성을 알았습니다. 뽀뽀 말입니다. 심통을 부렸던 것도 그렇습니다. 고백하는데 목욕을 시키다 물리기라도 하면 머리도 한 대씩 때리기도 했습니다. 물려서 당황했고 물어서 당황한다는 표현을 경험을 통해 공감합니다. 개를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골에 가면 마당에서 개를 기르려고 합니다.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고 싶습니다. 그놈에게는 원하지 않는 뽀뽀도 않을 것입니다. 내 기분대로 심통도 부리지 않을 겁니다. 때리는 짓은 절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밥은 같이 나누어 먹으려고 합니다. 먹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눈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억지로 먹이지는 않겠습니다.

 

 어머니는 매년 개를 길렀습니다. 반려견은 아니었지만 늘 감정을 나누는 대상이었습니다. 제가 어머니와 다투는 날이면 어머니는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녀석에게 가서는 내 마음 알아주는 놈은 네 밖에 없다큰 소리로 푸념을 했습니다. 저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녀석은 꼬리를 흔들며 어머니에게 붙었습니다. 이때 그 녀석은 개가 아니라 사람 같았습니다. 이 시대에 유행으로 기르는 것을 제외하면 유모차에 탄 개든 큰 개든 사람을 대체하는 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람처럼 불리는 것은 아닐까요?

시사인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