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시집. 창비 간행

무주이장 2023. 5. 24. 14:49

  저는 시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별 재미를 못 느끼니 잘 읽지 않습니다. 최근 마을 도서관에 들러 시집을 몇 권 빌렸습니다. 같이 동행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집은 금방 읽어서 사기가 좀 그래아내의 대답은 저와 반대였습니다. “시집은 두고두고 계속 읽으니 사서 읽어. 난 소설 사기가 그렇던데그동안 여기저기서 귀동냥하여 알아 둔 시집 몇 권을 빌렸습니다.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먼저 폈습니다. 시가 왜 이리 우울하고 슬픕니까? 그에게 어떤 슬픈 일이 많아서 시가 이리도 슬픈지 그의 프로필을 검색합니다. 1986년생입니다. 37살의 시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창비 블로그에서 안 시인과의 인터뷰를 확인했습니다. 시인을 소개하는 글에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슬픔을 끊임없이 마주하여 보듬어내는 시인. 흔들리며 울고 있는 존재들을 위한 시인. 섬세한 언어의 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시인시인의 시는 슬픔을 보듬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의 시를 조금 이해한 듯합니다.

 

1부의 시들

 

  날씨가 차고 조금 외로워서 불을 피웁니다. 태워 삼키는 불이 아니라 호주머니 속 언 손을 데우는 불,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하지만 불은 꺼진 지 오래지만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았답니다.  따뜻한 집에서 피운 불은 마음속에만 있고 이미 꺼져 쓸쓸한 기대만 보입니다(불이 있었다). 개조차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즐겨 소동이 일고(소동),  깨어진 꽃병 같은 망가진 삶은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갑니다. 탕탕 튀는 어린 개가 아니라 늙은 개와 동행합니다(굴뚝의 기분).  실패하지 않은 내가 남아 있다고 믿고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지만 탁자 위 한쌍의 천사 조각상이 나를 쳐다보는 순간 끔찍해 보입니다(업힌).  시인이 보는 것은 지상에서 어둠을 향해 막 걸음마를 떼는 사람입니다. 온종일 풀어도 끝이 없는 털실 뭉치를 푸는 시간과 마주 앉아 있습니다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려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때, 시인은 품에 안고 동행했던 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잠깐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면벽의 유령).  배웅하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모두 한 사람. 그런데 죽은 사람이랍니다(오후에).  눈부시게 푸른 계절, 맹렬히 자라는 식물들처럼 치닫는 게 사랑이라지만 그가 있는 곳은 삶 쪽은 아닌 듯합니다(망종).

 

 선잠에 든 듯했는데, 옆에 사람은 밤새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네가 돌아오지 못할까 겁이 났었다죽음 비슷한 것이 선잠이 되었습니다(선잠).  나무 한 그루를 베고 달고 긴 잠을 잤지만 숲에는 이제 수백 개의 나무둥치만 남았습니다. 꼼짝 않고 한밤중에도 우두커니 앉아 날개 없는 새가 된 숲을 지웁니다. 미동도 않고(미동).  보트를 타고 십 분만 가면 어마어마한 반딧불이 부락을 갈 수 있는데 더 어두워져야 출발할 수 있다며 기다립니다. 어둠을 기다립니다(마중).  아침 햇살을 보면서 자주 무릎이 꺾입니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연루).  슬픔이 혹독해질수록 시인은 마음속에서 점점 커지는 호수 이야기를 합니다. 아름답고 처음 보는 빛으로 가득한 호수입니다. 슬픔을 보듬고 슬픔을 이겨낼 호수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슬픔을 견딜 호수 이야기일까요(알라메다).  냄비 바닥이 까맣게 타도록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등 뒤에 있는 이 모든 것. 사랑이 왜 이리도 외로워 보일까요(사랑의 형태).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늑대로부터 시작되어, 매일 한 마리씩 양은 늑대로 변하지만 그래도 끝은 한 마리 양과 늑대 아흔아홉 마리이다. 결코 백 마리 늑대가 되려고 하지 않는 추리극을 시인을 씁니다 (추리극).

 

  슬픈 시어들이 이어집니다. 저는 늙은 개라는 단어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강아지를 산책하는 아이가 뛰어갑니다. ‘젊은 개는 팡팡 뛰면서 아이 앞에서 뛰어갑니다. 아이와 강아지의 보폭이 같은 리듬을 탑니다. 보기에 즐겁습니다. 반면에 늙은 개는 동행한 사람의 뒤를 따릅니다. 자주 돌아보며 강아지가 흘리는 추억을 주워 담으며 주인은 슬퍼합니다. 슬픔은 없앨 수도 이길 수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슬픔을 보듬고 흔들리며 울고 있는 존재들에게 따뜻함을 전하려는 의지보다는 나도 어렵게 슬픔과 함께 살아간다며 그러니 당신들도 외롭지 말라 전하는 속삭임 같습니다. 그의 시는 제목과 내용이 부합하여 제가 읽기에 그래도 편안한 시였습니다. 다만 슬퍼서 우울했습니다. 시를 읽는 내내 따뜻하기보다는 차가웠습니다. 1986년생  시인이 앞에서 끌고 가는 슬픔을 뒤에서 쫓아가기에 버거웠습니다. 젊고 튼튼한 개가 개줄을 잡은 늙은이와 잘못 만났습니다. 그래도 이런 감정 느끼게 해 준 시인이 고마운 게지요. 시 읽고 느낌을 정리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