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을 읽던 중, 생각 하나.
‘더디고 더딘 광복’이란 글에서 “4.19는 ~ 역사의 곡절 속에서 상실했던 기회를 되찾아, 제 뜻으로 설계하고 제 손으로 이행해야 할 나라다운 나라의 건설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안타깝게도 이 뜨겁고 거센 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길고 긴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독재자들이 견디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자문을 하면서.
“그들은 그것(4.19혁명)을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렸지만, 따지고 보면 그 혼란은 인간 심성의 복잡함이자 그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복잡함이며, 거기에 토대를 둔 온갖 사회적 가능성과 창조력의 복잡함이었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노래에서건 영화에서건 시에서건 모든 종류의 새로운 발상법이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하고도 남는다.”라고 자답한다.
구약을 읽으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고난이 오거나 살 만하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유대인들을 때로는 벌하시면서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바울을 고발하여 억울한 옥살이와 재판과정을 겪게 한 후, 결국엔 목이 잘려 순교하게 한 자들도 유대인들이었다. 원형의 죄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그러다 위의 황현산 선생의 글을 보면서 하나님을 다시 생각했다. 하나님을 따르고 믿기로 굳게 약속하고도 얼마가지 못하여 배신을 하는 인간의 혼란은 ‘인간 심성의 복잡함’이고 ‘그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복잡함’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그런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보장하여 사회의 가능성과 창조력의 복잡함을 스스로 알게 하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생각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변덕이 단순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단순함을 견디지 못하는 데에서 연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이런 인간의 복잡성을 독재자는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지켜보신다는 생각에서 더욱 든 생각이다.
인간의 복잡함과 그로 인한 인간사회의 복잡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혼란이 결국은 온갖 사회적 가능성과 창조력의 복잡함과 다른 말이 아닌 것을 반면교사인 일본 국민을 통하여 확인한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폭발 이후 방사능 피해에 대한 일본국민의 소극적인 움직임은 정부의 말만 믿고 따르는 질서정연함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사회를 단순화하여 우경화하는 국가를 막지 못하고 언젠가는 군국주의의 재현을 볼 수도 있다는 우려는 나만의 걱정일까. 혼란 없는 곳에 과연 정의와 평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총화단결된 일본국민은 어떤 나라를 만들까. 생각해볼 부분이다.
또한 지금 한창 혼란의 도가니인 홍콩의 경우는 어떨까? 많은 시민들이 정부에 맞서 싸우는 그 혼란은 “맥심그룹 창업자의 딸인 애니 우가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위에서 “폭도가 홍콩을 망치고 있다”(시사in, ‘홍콩 시위대는 물 흐르듯 싸운다’에서 인용함)”라고 주장한 것처럼 과연 그럴까. 기사를 쓴 여행작가 환타는 홍콩 시위대에게 매번 물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당신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들의 대답은 약속이나 한 듯 다음과 같은 세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의 이야기를 주변에 알리고, 우리를 위해 모여주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기억해달라.”
황현산 선생의 글에서 시작한 생각이 이렇듯 혼란스럽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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