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3

빈 옷장.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1984BOOKS 간행

이 책과 함께 읽고 있는 책이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단어의 집”입니다. “빈 옷장”을 읽고 난 후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안 시인의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정성과 사랑으로 기도로 길러진 존재들이다.” (125쪽)  과연 그럴까요? 얼마 전 뉴스에서 30대의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40대의 아들도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같은 소식을 제가 잘못 들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는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에 대항했다는 설명입니다. 너무 극단적이 예인가요? 키운 부모와 양육된 자식 간에 오해는 늘 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지푸스의 돌처럼 부모와 자식의..

매일 에세이 2024.11.07

카사노바 호텔. 아니 에르노 지음. 문학동네 간행

글이 작가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일에 무관한 듯 혼자 놀면 글만 화려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일과 떠나 글만 살게 된다면 글은 혼자 잘난 맛에 표현이 화려해질 것입니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아름다움이라는 사람들을 일컬어 탐미주의자라고 부릅니다.  헬조선 속에서 허덕이는 젊은이들이 사는 세상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작가들이 사는 세상은 같은 세상입니다.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심미안은 놀랍기는 하지만 부럽지는 않습니다. 심미안을 가진 그들은 세상의 부조리를 보는 정의안(정의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이렇게 부르기로 합시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아름다운 문학으로 설명하고 주장하고 설득하며 같이 아파하는 문학은 가능할 수 없을까요?  아니 에르노는 특별하게 분칠을 하지 않는 것..

매일 에세이 2024.10.18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빈 옮김. 1984BOOK 간행.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헌신적인 아버지부터 자식들의 등골을 빼먹는 백정 같은 아버지도 있습니다. 양 극단에 자리한 아버지를 두고 그 사이에 자리한 아버지를 분류하기 시작하면 수천 종의 아버지가 가지를 뻗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수천 종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기억하면 대체로 몇 개의 기억만이 회상됩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젊은 아버지, 어린 나를 키우던 겁 많은 아버지, 자식에게 기대하며 늙어가는 아버지, 자식과 나눌 대화가 남지 않은 병약한 아버지, 그리고 침상에서 눈물 흘리며 작별을 하던 나의 아버지.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졌던 아버지는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작은 거인으로 변했고, 마침내 한계를 드러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매일 에세이 2023.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