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로 집을 세우는 왕들 이야기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QT시간을 갖습니다. 그동안 로마서를 통하여 율법이 아닌 새 언약에 대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기독교가 말씀 속에 갇힌 죽은 종교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현실 속에서 펄펄 뛰는 행하는 종교임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고 사회적 약자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돌봄의 은혜를 받게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매일성경’은 예레미야 22장 10절~19절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야 왕의 아들 살룸(여오아하스 왕)과 여호야김 왕의 불의를 고발하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살룸 왕은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에스겔 19:3)로 표현되듯이 포악한 왕이었답니다. 결국 그의 통치는 삼 개월 만에 막을 내립니다. ‘모든 권력에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권력자들을 평가하시고 보응하실 것입니다’(매일성경 124쪽)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이 주신 힘(권력)을 불의하게 사용해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고 주신 힘을 도리어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나라를 굳게 세워야 할 왕이 자기 집을 짓느라 국력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그러나 남용한 권력은 비수가 되고, 착취한 동족은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22:16)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모두 영어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를 정치적 보복이라고 변호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압니다. 다음 정권교체기에 지금의 정권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벼르고 똑 같이 보복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정치보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은 정의와 공의로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게 하는 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기고 함부로 사용한 권력의 남용은 평가받고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정권의 수행자들께서도 유념하셔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곡학아세의 논리에 너무나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밝혀진 권력남용의 사례만 유심히 보시면 정치보복이라는 말이 말장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전 대통령의 재판을 예수님의 수난과 비교하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였답니다. 새 언약 대신 옛 언약인 율법을 마음대로 인용하며 하나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비슷한 사례가 명성교회의 아버지 목사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목사가 아들 목사에게 세습시킨 교회권력에 대해 2년 전 아버지 목사가 은퇴했으니 세습이 아니다 라는 말로 변명하고 총회에서 거부한 세습을 사탄이 아버지 목사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공격하는 것이니 우리도 반격해야 한다는 설교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십시오. 아버지 목사가 아들 목사에게 교회 권력으로 상징되는 목사직을 넘긴 것이 사실입니다. 2년 전 은퇴가 면책사유라고 주장하는 것은 뻔뻔한 논리입니다. 아들 목사가 권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차라리 대야 합니다. 세상에는 아들 목사보다 나은 목사가 없다고요. 아마 아버지 목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일 겁니다. 육신의 욕망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민사상에 찌든 유대인들을 제사장으로 이스라엘을 제사장 국가로 삼아 열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자 한 하나님의 의도는 실패 했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인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어 죄 없이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부활하게 하사 우리에게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사 언젠가는 그들을 회심하게 하시겠지만 구약의 약속은 이제 새 언약으로 대체된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이 보내주신 보혜사가 이제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다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신 목적이 새 생명으로 하여금 행하게 하려는 것임을 믿습니다. 지금 권력의 남용에 대해 보응하시는 하나님보다 저는 그들을 용서하고 회개하게 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가 예레미야 성경을 인용하면서도 찜찜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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