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시사in 읽기 855호. 뉴스가 독자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최창근 외부 기고

무주이장 2024. 2. 12. 10:55

 독자에게 뉴스 읽는 맛을 주려면 공급자 중심의 기사가 되면 안 된다는 요지의 글입니다. 공급자 중심의 기사란 독자가 기사를 다 읽었는데도 ‘이게 무슨 말이야?’ 하고 되묻는 경우를 말합니다. 독해력이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닙니다. 기사가 사건의 앞뒤 맥락과 핵심 용어를 독자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전제한 채 작성되어 그런 것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맥락을 파악하고 다른 이에게 설명하는 일, 이런 경험은 ‘뉴스 읽는 맛’으로 이어집니다. 효용을 느낀 독자는 뉴스를 다시 읽습니다. 뉴스가 어렵다고 외면하지 않고 언론 곁으로 계속 돌아옵니다. 언론도 자극적 이슈와 헤드라인으로 독자와 ‘일회성 만남’에 그치는 일에서 벗어나, 오래오래 독자와 관계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최창근 씨의 주장입니다.

 

 기사를 쓰는 요령은 과거 중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육하원칙을 이용하여 쓰고, 공평무사하게 쓰며, 다른 입장을 고루 쓰는 것이 기사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편을 짜서 글을 쓰되 남이야 믿지 않지만 자기는 공평하고 무사하며 중립을 지키고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골고루 반영한 기사를 쓴다고 주장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제가 배울 때는 기사는 사설과 다르다고 배웠습니다. 이제 기사는 광고도 되고 사설도 되고 에세이도 되고 소설도 되며 괴담도 되고 루머의 근원도 되는 지경에 달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뉴스 읽는 맛’을 알려드립니다. 딱 하나만 하시면 됩니다. 뉴스를 말하는 자는 누구 편인가를 알만큼 지면을 뚫을 정도로 차갑고 뚜렷한 시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좋은 주식을 소개한다면서 접근하는 자들은 내 편이 아닙니다. 누가 돈 벌 기회를 그렇게 쉽게 가르쳐 주겠습니까? 그대에게서 돈을 뺏기 위해 유혹하는 게지요. 사기를 치는 놈들이 유튜브에도 카톡에도 넘칩니다. 그런 사람을 구분 못하면 사기를 당합니다.

 

 ‘중립적’이라고 하면서 제목을 비틀고 사실관계를 비틀고 시야를 왜곡하여 뉴스를 만드는 자들이 누구에게 빌붙었는지 아셔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대출을 많이 해 주는 희소식이라며 집을 사라고 할 때 그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노망 든 불쌍한 늙은이처럼 벽에 똥칠을 하듯 여기저기 뉴스칠갑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리고는 ‘영끌족의 추락’이라며 개인의 욕망을 탓할 때가 곧 도래할 것입니다.

 

 사람이 비참함을 느낄 때는 사람에게 속을 때입니다. 속아서 깊은 상처를 입으면 사람이 싫어져 아예 자연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애초 믿지 않는 사람에게 속을 때는 자신의 소양을 탓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욕심이 과해 속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상처가 깊지 않습니다. 최악의 비참함은 믿는 자에게 속을 때입니다. 그러니 먼저 사람을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듣고 싶은 얘기라고 솔깃하지 마시고 그자가 어떤 놈인지 분별하셔야 합니다. 제게 “어떻게 하면 분별할 수 있니?”라고 물으시면 이런 놈들은 대체로 남을 속이기 위해 잡다하고 번잡하게 말을 하는 습관이 있으니 그동안 그가 배설한 말과 글을 시간 내셔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뉴스 읽는 맛을 얘기하려다 속지 않는 방법으로 글이 변질되었습니다. 뉴스가 사기에 가까워진 세상이라 이렇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변질된 게지요. 용서하십시오.

시사인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