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경험
저는 운동경기를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직접 하는 것은 기회가 주어지면 즐겨 하지만 보는 것은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유럽 축구를 보면서 흥미가 생겼습니다. 축구 경기장이 마치 전장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건장한 체구의 선수들이 몸을 부딪히면서 골에 공을 집어넣는 과정에 튀는 땀과 긴장된 근육을 보면서 유럽 대륙에서 피를 튀기며 전투를 하는 전사들을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전장과 경기장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장에서 타인은 소멸의 대상입니다. 반면 경기장에서는 타인은 공존의 대상입니다. 둘이 비록 싸우며 경쟁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들 팀은 경기에 졌다고 소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존재해야 경기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 간에는 비록 다른 팀의 선수라고 하더라도 서로 친한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팀을 바꿔 경기를 하기도 합니다. 순화된 전투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자는 서로 다른 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야 하므로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팀, 우리 정당, 우리 소신과 반대되는 곳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다른 팀, 다른 정당, 다른 소신을 인정하고 타협을 하는 것이 정치가 하는 일 중 하나라고 합니다. 서로를 인정하려면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할까요? 전 승리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자는 “강자는 대개 권력 행사에 서툴고, 약자는 권력에의 저항에 서툴다.”라고 말합니다. 강자는 자신이 가진 힘 이상으로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을 원하고, 그렇게 정도 이상으로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작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권력은 약자로 하여금 권력의 증강 현실을 체험하게 하여 실제 이상으로 권력의 위력에 짓눌려 저항에 서툴게 되는 것이라는 게지요. 권력자들은 욕망과 목표가 있습니다. (58쪽) 5년간 절치부심한 용산의 권력은 검찰을 이용하여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발에 차꼬를 채우는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위임된 권력을 행사합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입만 갖고 사는 언론인들에게 ‘원스트라이크 아웃’을 시키겠다고 협박하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언론사 사장을 권력을 이용하여 쫓아냅니다. 시청료 징수 방법을 바꿔 소속 조직원의 사회적 생존에 두려움을 갖게 하여 권력에 순응한 행동을 강요합니다. 권력을 되찾은 사람들은 승리의 기쁨에 이러한 권력행사에 문제의식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이들 권력에 맞선 상대는 이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비판과 반대와는 별개입니다.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속이야 부글부글 끓지만 어떻게 저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한국에는 악의 존재에 맞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고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온 역동적인 정치사가 한국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로 현대 한국인의 마음에는 대규모 정치적 시위가 준 효능감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각인되어 있다며 1960년 4월 거리의 시위를 통해 독재와 국가폭력을 일삼던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을 하야시킨 승리의 기억, 1987년 6월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직선제를 쟁취한 정치적 승리의 기억, 그리고 2017년 현직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낸 정치적 승리의 기억을 호출합니다. (93~94쪽)
우리는 모두 이런 승리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억은 같이 공존하기 어렵다며 상대를 혐오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폭력이 난무했던 상황을 바꿨습니다. 어느 쪽에 서있던 모두 승리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은 단지 희망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겨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축구 경기와 마찬가지로 정치도, 선거도 승리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권력자가 자신이 가진 힘 이상으로 상대가 두려워할 것을 원할 때, 피식 웃어줄 수 있습니다. 핫바지 사이로 새는 방귀나 마찬가지인 헛소리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습니다. 참아낼 수 있습니다. 친일이 숭일이 되어도, 홍범도 빨치산 의병대장이 육사에서 쫓겨나고 만주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백선엽이 개선장군이 되어 육사에 자리를 잡아도, 우리가 참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승리의 경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 4월이면 국회의원 선거를 합니다. 의회권력이 행정부 권력을 견제하는 힘을 가져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치열한 경기가 예상됩니다. 파이팅입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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