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자국, 김애란 소설, 창비 출간.
자식은 애미와 영원히 같이 살 것처럼 까붑니다. 대들고, 미워하고, 애달파하면서도 사진 한 장 찍어 보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간이 자기편인 것만 알지 엄마의 편이 아닌 것을 모르는 게지요. 내가 누렸던 시간과 엄마가 겪었던 시간이 달랐다는 것을 아는 때가 엄마를 영정 사진으로 보는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매개물이 엄마가 평생을 썼던 칼입니다. 그 칼은 아버지의 무능력을 견디게 했고, 아버지의 정부를 알면서도 참아내는 힘이었습니다. 딸을 나무라면서 “배때지를 쑤셔버리겠다!”는 연극적인 나무람의 바탕이 되는 사랑이었습니다. 엄마의 칼 때문에 딸은 진정으로 배곯아 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왔던 까닭이라면서 자기의 창자와 심장 간이 무럭무럭 자란 것은 엄마의 칼자국이 있던 음식을 먹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의 마음은 어땠는가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마음을 소금기에 절어 딱딱하고 갈라진 피부와도 같은 마음이지만 써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장에서 사 온 칼을 집에 들일 때는 그게 내 팔자가 드셀 거란 예감은 없었다. 남편이 벌어오는 알뜰한 돈으로 생선이며 돼지고기, 야채를 사서는 썰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도 않았다. 그저 그건 부엌에 한 개는 있어야 할 칼일 뿐이었으니. 남편의 말 “인생 원래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거다.”는 말이 못 배운 내 귀에는 좋게 들렸다. 그놈, 평생 밑바닥에서만 살았다. 그래도 웬수야 하고 고래고래 싸우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사람 본성은 변하지 않으니까.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내가 내 손가락으로 내 눈을 찔렀는데. 내가 니 아버지를 원망 않아야 너도 이 애미를 원망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너에게 그악스러운 욕을 한 것은 미리 애미에게 미움을 갖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미안하다.
지금도 네게 고마운 일은 무엇이든 만들면 네가 잘 먹어주었다는 게다. 칼국수에 지겨울 만도 한데, 지치지 않아 고마웠고, “오늘 칼국수에는 감자가 들었네.”라며 젓가락을 명랑하게 젓는 네 모습에 감격할 때도 있었다. 그런 마음의 뒤에는 늘 미안함이라는 쓰레기가 남았지만, 그게 언제 수거해 갔는지 썩은 냄새를 풍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섯 개의 칼을 평생 썼지만, 내가 아꼈던 칼은 네가 생겼을 때 가졌던 그 칼이었다. 시장에서 1500원을 주고 샀던 특수 스뎅으로 만든 쇠에 두드려도 이가 빠지지 않던 그 칼 말이다. 그 칼만 있으면 내가 너를 지켜줄 것으로 믿었다. 네가 나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방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젓가락질하는 너를 보면서 내가 받지 못했던 여자가 받는 일상적인 배려를 너는 충분히 누리길 바랬다. 네가 시집가서 사는 모습을 보며 내가 잘했지 싶었다. 네가 사는 모습에 늘 고마왔다. 너의 행복은 나까지 행복하게 했다.
내가 주방에서 칼국수를 끓이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평소에도 했다. 네 아비를 생각하면 때려치우고 싶었던 장사였지만,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니 그럴 수도 없었고, 너를 키우면서 네 아비와 싸우는 것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의 인생은 딸에게도 유전되고 대를 이을 것이라는 말이 늘 걸렸다. 내가 정말 잘한 것은 여늬 엄마가 말썽 부리는 딸에게 늘 하는 말을 않은 것이었다. “니하고 똑 닮은 딸을 낳거라.” 넌 나처럼 살면 안 될 일이기에 절대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제 죽어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세상으로 떠나가지만 후회와 회한은 없다. 내 딸을 지키고 키웠으니.
항상 건강하고 네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도록 해라. 엄마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들거나, 더 행복했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 딸이 생각한 엄마 그대로가 맞다. 내가 쓴 글이 내 지난 삶을 더욱 구체화시켰고, 나도 재미나게 읽었다. 엄마를 이해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에 고맙구나.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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