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칼빈, 고통의 문제에 답하다(칼빈의 욥기 설교) 임형권(매일성경)
제가 욥기를 처음 읽고 의문을 가지고, 속마음으로 반발을 한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이 사탄의 제안을 받고는 두 번이나 수락하여 욥을 고난에 빠뜨립니다. 그럼 사탄은 하나님과 동격이 아닐까? 서로 자랑하고 비판하고 경쟁하는 라이벌 정도?
2. 욥과 세 친구들과의 대화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친구들의 논리가 천편일률이고, ‘어디서 약을 팔아’ 하는 반감을 가졌던 것?
3.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듣고는 나타나셔서 세 친구의 말이 틀렸다며 욥의 잘못을 지적한 후 다시 그에게 복을 주시니, 하나님은 자기 과시를 위하여 개인의 고통을 이용하고, 잘못을 물질로 보상하는 장사꾼?
4. 욥이 자신은 떳떳하다고 대꾸하는 모습에서 그의 불행이 왜 필요했는지에 대하여 묻는 용기에 감탄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욥을 강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너는 아직도 전능자와 논쟁하려 하느냐? 나, 하나님을 비난하는 사람은 대답하여라”(40:2) 위협합니다. 결국 욥은 “주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주님의 뜻을 방해할 수 없는 줄 압니다. ‘무식한 말로 내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지요? 정말 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을 아는 체하였습니다.”(42:2-3) 자백 합니다. 상황을 돌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고작 그런 목적의 능력?(말씀은 아가페 쉬운 성경에서 가져왔습니다)
매우 불손한 표현이지요?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왜 그래? 비난이 있을 줄 압니다. 욥 이야기만 나오면 전 아직도 저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매일성경 10월의 마지막에 칼빈의 욥기 설교라는 글이 있어서 본 이유입니다. 그는 어떻게 욥기를 설명할까?
칼빈은 욥을 진정한 신앙인의 모범이라고 합니다. 당시 교황주의자들과는 달리 올바른 신앙의 척도를 외적인 형식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태도와 거기서 비롯한 삶에서 찾은 칼빈의 견지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욥은 인간적인 부와 행복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인정할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불행도 자신의 잘못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생각할 수 없던 것입니다(그래서 세 친구의 지적질에 반발했던 모양입니다. “내 잘못 아니야!”) 세 친구는 인과론에 갇혀, 불행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고 한 반면 욥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인간은 그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진 전형으로 칼빈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욥에게 고난을 주셨을까요? 수아 사람 빌닷은 욥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라고 말합니다(쉽죠?) 하지만 욥은 자신이 당한 고통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러니 대들죠. 하나님조차 자기와 논쟁하려고 하느냐며 욥을 겁박합니다) 칼빈은 인간은 타인과 비교해 볼 때 의롭다고 생각하거나, 이타적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불의를 감추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면서 자기기만과 위선의 배후에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고, 이런 교만의 병을 치유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약이라는 것입니다(욥기에서 저는 욥의 교만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사탄의 제안만 보였습니다. 이건 제 잘못이겠지요?)
칼빈은 인간이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완고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말로 하는 설득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로 들려 겁이 덜컥 났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통을 통해 욥도 더욱 하나님께 다가가길 원했고 이에 부응하여 욥은 철학적 지혜로 욥의 고난을 지적으로 공격하는 친구들에게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이성의 잣대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친구들에게 침묵하라고 말한 것이랍니다(그럼 하나님이 굳이 마지막에 나타나시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 왜 나타나셔서 논쟁할래?! 말씀하셨을까요?) 고난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한다는 요지입니다.
칼빈의 설명에 따르면 욥은 세 친구와 달리 죽음이 신의 가장 큰 심판의 표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있는 재산을 잃은 것은 별 문제가 아닌 욥이었습니다. 자식을 잃고 아내에게서 저주를 받는 것도 견디고, 온몸에 종기가 나서 살 수 없을 고통도 견뎠습니다. 세 친구가 와서 충고라며 조롱하는 것조차도 참아냈습니다. 그가 어떤 소망을 가졌을까요? 오 하나님! 주가 주신 고통에 대하여 이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하신 것이니 감사합니다, 기도드렸을까요? 그럼 하나님은 다른 모습으로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칼빈은 개인 욥의 고난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하신 것에 멈추지 않고, 세계 통치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논리를 확장합니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타인을 지배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인간들의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상 권세자들을 세우셨고 악인을 처벌하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칼빈은 더 나아가 특정 권세자들이 교만해질 때 다른 권력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세계를 보존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경제적, 자연적 고난이 없다면 인간은 방종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평화롭게 살면 방종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율법일까요? 아니면 현상일까요? 하나님의 율법이라면 피할 수 없고 현상에 불과하면 스쳐 지나가면 될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길을 가다 이상한 사람을 보면 피하듯이 말입니다. 이건 조금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오늘 또 욥을 생각합니다. 칼빈은 결과를 갖고 이를 조합한 듯한데(아님 임형권 저자가 그렇게 해석한 걸까?) 아직도 나는 욥의 고난이 이해가 안 됩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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