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느냐 옥한흠 저 DMI출판
1부 그렇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 뿌리 내린 믿음(골로새서 2장 6,7절)
-'예수를 믿는다'는 일차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시며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줄로 알겠습니다'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차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복종해야 할 나의 주권자가 되심을 알고 그분께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왜 자기 혁명이라 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하던 대상이 나 자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의무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행한다'는 것으로 성경적으로 풀이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그분을 위해 순종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세속주의와 같은 시험을 받고 있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골로새서를 썼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는 매우 간사한 마음의 처신이 적당주의 신앙이며 세속주의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당히 믿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멍들고 근본적인 정신을 상실하여 껍데기만 남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믿음 안에서는 예수를 알고 싶어 하는 갈증이 생기는데 '무지'씨는 이 갈증이 없습니다(존 번연의 천로역정 가운데 무지라는 인물 설명 중)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앞에서 말씀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내 마음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배우면 예수님과 만나게 되고, 배우기를 사모하고 힘쓰는 동안 예수님과 깊이 사귀게 됩니다.
2. 나를 따르라(누가복음 9장 57~62절)
-'예수를 좇는다' 혹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대로 배운다는 뜻입니다.
-서기관은 학문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던 지도자입니다.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는데, 당시의 바리새파는 전국에 걸쳐 약 6천여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서기관이 예수님을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했지만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나.서기관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청한 것은 당장의 장례식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에 동의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할 사람을 향해 "나만 따르라"고 말씀하실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 뒤에는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자신의 가족이나 사업, 생활보다 예수를 먼저하라고 하면 '광신주의자'라고 표현합니다. 남편도 자식도 내버려두고 교회다 기도원이다 하면서 목사만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극단주의자'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극단주의를 통해 배워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바로 보았습니다. 다만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세상의 것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닌 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가족과 의논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쟁기를 잡았을 때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이 나뉜 것입니다.
-내가 회사에서 24시간을 보내든 가정에서 24시간을 보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본질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마음을 드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을 다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거룩합니다.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3. 참믿음과 거짓 믿음(요한복음 6장 22~36절)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 표적만을 바라며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표적이 아닌 다른 이유로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표적을 찾느라 예수님을 쫓아다닌다고 사람들을 꾸짖으셨으나 이번에는 표적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나무라신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이적 자체만을 위해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예수님이 지향하시는 의미와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없는 이적은 절대로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떡은 잡았는데 예수님은 세상의 생명이요 부활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표적을 행했건만 예수님을 놓쳤습니다.
나. 이 군중이 집착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떡을 먹고 배 불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비한 표적만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책망하셨지만 표적을 본 후에도 그 뒤에 숨은 예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 역시 동일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참믿음은 100퍼센트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어야 합니다. 참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나의 전인격적인 신뢰입니다.
4.세 가지 믿음(요한 복음 11장 21~44절)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통해 믿음의 세 유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조건적인 믿음
나.이론적인 믿음
다.체험적인 믿음
-조건적인 신앙은 자신의 판단이나 문제의 성격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적 수준이 높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조건적인 신앙의 맹점은 신앙의 근거를 예수님이 아닌 자신에게 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자기 믿음 전체를 삼고 있는 것으로 대조적입니다. 먼저 판단하고 믿으려 하지 마십시오. 자기만의 한정된 이성과 상식과 능력으로 문제에 대한 결론을 미리 내린 다음, 하나님을 찾지 마십시오.
-내가 믿은 교리와 현재의 삶이 연관성을 갖지 못하고 동떨어진 것을 가리켜 이론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즉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체험이란 내가 믿는 신앙과 삶이 하나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보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믿는 자가 보고, 믿으면 보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 15:28)"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11:40)"는 같은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리아지 체험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지배하시는 아름다운 영역이 천국입니다.
-'중생(重生)’이란 예수를 안 믿던 사람이 그 분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중생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2부 사랑합니다.
5. 예수를 따라가려면(마태복음 16장 24~27절)
-마태복음에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1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받는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뜻이 담긴 말씀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노(No)'라고 말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항상 '예스(Yes)'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뜻에 대해서는 언제나 노,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스! 이런 자세가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아는 단순 개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복합적인 개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반면에 타락의 결과로 내 안에 남은 자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옛 자아를 멸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말(갈라디아서 2:20)은 나의 옛 자아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사는 이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틀림없는 내 본성, 즉 옛 자아는 계속 남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타락의 결과로 내게 남아 있는 자아를 부인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신 안에 있는 두 자아를 인식합니다. 성령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 다시 말해 새로운 자아와 옛 자아입니다. 옛 자아를 부인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면 자연적으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기를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헌신한다',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을 무겁게 가질 필요가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가끔 장난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같습니다. 진짜로 좋은 것, 가장 복된 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속에 감추얻는 경향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나중에는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간다"고 십자가를 진 선배들의 증언은 결국 하나님이 능력과 기쁨과 위로를 주셔서 십자가를 거뜬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 같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내 호주머니 속에 큰 재산이 들어올 때보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로 인해 웃을 때 참된 기쁨을 누리도록 말입니다.
6.옥합을 깨뜨려라(마가복음 14장 1~9절)
-두뇌가 비상했던 가룟 유다는 제자들 사이에서 회계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를 위시한 제자들이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 거액을 썼다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허비라고 여긴 것입니다.
나. 가난한 이들을 도외시한 채 거액을 허비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가. 마리와와 같은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절대로 허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 또 하나는 가룟 유다를 위시한 제자들의 그룹으로 주님을 위한 헌신을 허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지도, 그들을 향해 잘못을 고치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사고방식은 칭찬받을 만한 것도 아니고 나무랄 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6절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라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감이러라" 라고 하시므로 가룟 유다가 마리아에게 한 질책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읽었습니다. 목사님 제 말도 맞나요?)
-그리스도를 향해 불같이 뜨거운 마음을 가졌다면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상식에 매여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불같은 마음을 토하지 마십시오. 제자들이 마리아를 욕한 것처럼 미쳤다는 욕을 들을 것입니다.
-한 성경학자가 참 멋진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 진짜라면 그 안에는 항상 일종의 낭비라고 여겨지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은 내가 가진 전부를 주었다고 할지라도 설혹 이 세상 전부를 바쳤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아무 것도 준 게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부끄러움을 없애줍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를 지시는지, 마리아는 그 이유를 분명히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다름 아닌 자신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오빠 나사로가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 무엇인들 아깝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7장. 달라진 소원(빌립보서 2장 12~16절)
-흔히 '믿음'을 많이 강조하는데, 믿음과 똑같은 선상에 놓고 강조해야 할 것이 '복종'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참된 증거는 바로 복종입니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으면 믿음 역시 가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종은 구원받은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복종합니다. 복종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됩니다.
-그렇다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 문에 들어갈 때까지 어느 누구도 구원 여부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날마다 부들부들 떨면서 조심하고 선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워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가.성숙한 신앙 인격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철이 안 든 병든 인격을 빨리 성숙시키라는 뜻입니다. 목사든 성자든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는 이상 신앙 성숙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몸부림치는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나.값없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영생 얻을 때까지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것을 천국에 들어가는 날까지 잃어버리지 않도록 붙들고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만 이 두 가지가 가능해집니다.
-성령을 통해 나의 소원이 바뀔 때는 그 내용보다 질과 목적이 달라집니다. 흔히 소원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띠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나의 소원을 바꿔놓으시면 매사에 하나님 중심이 됩니다. 낮은 수준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복종이 아니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에 내가 발맞추기를 원하는 것이 복종합니다.
3부 따르겠습니다.
8. 평범한 날의 신앙생활(창세기 5장 21~24절)
-우리 생은 평범한 날로 이어지고 평범한 날로 쌓이며 평범한 날로 채워집니다. 평범한 날을 바로 살았으면 위대한 삶을 산 것이고, 실패로 점철된 날을 살았다면 아무리 특별한 날이 있었다고 해도 우리 생은 실패했다고 봐야 합니다. 평범한 날을 영적으로 승리하며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에 이르러서, 성경은 두 가지 특별한 내용을 기록합니다(창세기 5:24)
가.하나님이 데려가셨음을 말씀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들 중 두 사람만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그 하나가 에녹이고, 다른 한 명은 엘리야입니다. 둘 다 똑같이 승천한 영광의 사람이지만 그들의 삶은 현격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어찌 보년 엘리야의 삶은 굉장히 화려했습니다. 그에 비해 에녹은 한마디로 평범한 인생이었습니다.
나.하나님과 동행했음을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은 두 사람에 대해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에녹과 노아입니다. 엘리야나 노아와는 달리, 평범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음을 에녹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하루하루의 삶을 뒷전으로 미룬 채 자극을 찾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가 있으면 그것을 잘 간직하고 그 은혜 안에서 평범한 날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찾는 것이 바른 모습입니다. 신앙의 가장 기본 되는 요소는 평범한 날을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녹에게서 배워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가.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동해한 두 유형의 사람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유형은 요셉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에녹과 노아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고 어린 요셉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그를 떠나시지 않은 것이고, 에녹의 경우는 에녹 편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닐기를 힘쓴 것입니다. 따라서 에녹이 좀 더 성숙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그러셨듯이 에녹을 찾아왔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범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에게 찾아와 동행하시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필수적으로 두 가지 요건이 따라야 합니다.
가.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의 사람이라는 이 두 가지 요건을 바로 갖추지 못하면,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즐기면서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가.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는 시간을 매일 구별해야 합니다.
나.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침묵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한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성경을 읽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아버지가 가정에서 해야 할 세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인도하고 보호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즐기면서 보내는 하루는 절대로 무미건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일이 내 뜻대로 잘 안 풀린다고 할지라도, 나의 영적인 삶은 결코 피폐하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9.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장 9~17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체험을 맨 먼저 한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제일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중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먼저 다가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민 중에서 택하여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다만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신 7:7,8)
-나와 하나님은 원수 된 관계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은 체험적이요 개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점검하기 위하여 던질 세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기쁨이 있습니까?
나.내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주신다는 확신과 담대함이 있습니까?
다.예수님과 나 사이가 친구 관계와 같아서 모든 것이 통합니까? 친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비밀이 없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한 장치가 됩니다.
10. 열매를 많이 맺으면(요한복음 15장 1~8절)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일, 곧 잘라버리고 깨끗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잘리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이는 세상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잘려나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콧대를 세우며 교만히 행하던 유대 사람들이 잘라버려짐을 당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를 자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면 참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입으로만 "주여, 주여"라고 할 뿐 내면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잘라내십니다. 방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제거해버리신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열매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라는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가.누군가에게서 배우고 그를 닮아가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나.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임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참으로 하나하나가 귀중한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열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삶 속에서 인격적 성숙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흔히 '충성해야지, 열심히 봉사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충성도 좋고 봉사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인격입니다. 올바로 되지 않은 사람이 일을 하면 문제만 일으킵니다. 이리저리 사람들과 부딪히며 상처를 주고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지탄받는 이유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을 안 해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곳에 가서 자선활동을 하지 않아서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 예수"하면서도 인격적으로 차이 나는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일이 우선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순종하지 않으면, 즉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은 나가버리십니다. 밖으로 나가신 주님은 언제 다시 들어오실 수 있을까요? 내가 회개해야 들어오십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과 지속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생활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깊이 있는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기도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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