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정리1 주님과 동행하십니까/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김병국 옮김/도서출판바울
1. 만년 갓난아기 신자
때로는 숫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우리들의 교회를 바라보며 우리는 자신을 속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숫적 증가가 곧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덤들도 역시 숫적으로는 증가하고 있으니까요(좋은 비유^^)
성장이란 생명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 있다면, 우리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등등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덕목들에 있어서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들은 영적인 생명이 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우리 스스로가 인위적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성장을 찾아 볼 수 없는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생명에 중점을 두는 대신 너무 관념적 개념들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교리를 실천에 옮겨야 하지 개념인 교리에서 꼼짝 못하면 안 됩니다. ~ 세례를 어떤 방식으로 베풀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와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교리시험 따위가 없습니다. ~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고, 봉사하고,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장은 우리가 우리 삶의 중심을 예수님께 맞추고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알 때에 자연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한 분 그리스도께 중심을 맞춘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기독교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루해졌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보고 듣는 것들이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항상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찬송가, 똑같은 설교, 똑같은 예배의식.....그분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그분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사셨던 방법을 모방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성경의 저자 자신을 우리 속에 모시고 있으면, 그분 자신이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에 성장은 자연스럽게 옵니다.
2. 샌들을 신고 턱수염을 기르신 그리스도
고린도 교회의 사역자는 바울이 첫 번째, 아볼로가 두 번째, 베드로가 세 번째 였답니다. 고린도교회가 세 사도의 팬으로 분리될 때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16)라고 서신을 보냅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직함이 의사이건 혹은 사도이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직함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측근에서 모시며 살았었다고 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주님을 아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처음 만난 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였습니다. 후에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중앙 본부가 있는 삼층천으로까지 부름을 받아 올라갔습니다. 그때는 주님과 인터뷰도 나누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바나바가 바울의 고향으로 가서 그를 안디옥으로 불러오기까지, 그 사이 몇 년 동안 바울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2~3년 동안은 광야에서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늘로 올리워 갔을 때,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주님은 턱수염을 기르시고 샌들을 신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영광 가운데 계신 영원하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바울은 원래 상태대로의 그리스도를 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 서신들을 읽어 보면 그가 복음서에서 단 한 번도 인용한 적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바울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서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역사상의 그리스도보다는 지금 살아서 역사하시는 영원하시고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 찾아 오신다면, 그분은 베드로와 함께 거니셨던 모습으로가 아니라, 원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찾아 오실 것이 분명합니다.
3. 새 언약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 사람은 시시각각 위로부터 들려오는 최신 뉴스를 들으며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과거의 그리스도보다는 현재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저도 지금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놓치기보다는 차라리 육신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놓치는 편이 낫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놓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하게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지식은 정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성장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주님에 대해 아는 것은 동적인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알면, 당신은 계속 더욱 더 주님을 알아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사실이 당신의 영적 성장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턱수염을 기르고 샌들을 신은 분에 대해서만 안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 육체 뒤에 숨어 계십니다. 히브리서 10:19~20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한 것은 성소에서 지성소(지성소는 휘장으로 닫혀있었고, 일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로 들어가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즉 복음서의 그리스도를 넘어서서 영적으로 그분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날 육체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께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이기보다는 역사 중심적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에 관한 교리들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분오열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옛 언약은 십계명으로서 돌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고린도후서 3:3) 바울의 말을 따르자면, 새 언약은 문자로 적힌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도 아니고 신약도 아닙니다. 또 그것은 십계명을 영적으로 해석한 것도, 산상보훈도 아닙니다. 새 언약은 영입니다.(고린도후서 3:6) 주님 자신이 영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십니다. 새 언약은 종교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따라 살아 가려고 노력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창시자를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그분 자신이 우리가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할 법이 되십니다.(고린도후서 3:17) 바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고린도전서 6:17)
옛 언약은 영광스러운 언약이지만 죽음의 사역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많은 아름다운 법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옛 언약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불렀습니다.(고린도후서 3:13~16)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가 끔찍스러울 정도로 좌절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마구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돌아올 때, 수건이 벗겨지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고 난 후, 산을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영광이 앞으로 사라져 버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둘렀습니다. 광채가 사라지면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백성들이 수군거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의 모습입니다. 율법과 문자에 순종하고 있을 때 얼마 동안은 잘 지내는 것 같지만 문자의 거룩은 대개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 영광은 빨리 퇴색해 버립니다. 담배를 끊었다가(영광) 다시 피면(퇴색) 그렇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고린도후서3:18)
우리들의 삶 속에 자리잡은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월이 흐르면 점점 사라져가는 대신에 오히려 영광에서 영광으로 화하여 점점 더 강해져 갑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를 기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외적인 거룩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부러 노력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솟아 오르는 내적인 거룩함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수건이 벗겨진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는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저는 지금 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마치 두 분이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다른 모습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제부터는 옛 언약인 구약을 벗어나 비록 같은 옛 언약이지만 신약을 주로 강론하고 구약은 참조만 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 단지 종교가 아닌 예수와 함께 하는 새 언약을 강조하는 논리를 새로 세우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의문을 (책을 읽고 있는 현재) 가지면서 흥미진진하고 기대되는 책읽기를 하는 중입니다.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로마서 5:10절에서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구원받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동적인 실체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갖고 계신 현재의 생명때문입니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산다는 것이고, 또 이미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사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새로운 창조의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고린도후서 6:16, 빌립보서 2:20, 마가복음 16:20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사셨고 그들 가운데로 걸어 다니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위대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면 이제 주님과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시작하십시오. 이제부터 당신의 삶에 찾아오는 모든 문제들을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시작하십시오. 거의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인위적으로 모방하려는 노력을 그만 그치시고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성품 속으로 흘러 들어 가시도록 하십시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 자유는 율법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옛 언약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지금 당신의 모습을 통해 당신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유입니다.
4.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물질적 증거를 갈구했습니다. 저는 본장에서 오직 한 가지 하나님 나라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바로 여기 우리들 속에 계십니다. 영적으로 된다는 것은 단지 항상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된다는 것은 일상 생활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에베소서 3:16,17절, 예레미야 31:33, 에스겔 36:26,27절, 요한복음 7:37~39, 고린도전서 6:19)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외적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안에서’ 역사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역사합니다.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사실로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를 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중의 많은 곡들이 옛 언약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노래한 “저들이 나에게 우리는 주의 집으로 가자고 말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는 “저들이 나에게 우리는 주의 집이라고 말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재번역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이미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모든 충만함과 영광 가운데 우리 속에 거하시는 주님을 보기 위해 우리의 눈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종교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경배와 찬양을 드릴 때에 두 팔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 속에 있는 기쁨을 참지 못하여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고자 두 손을 높이 쳐든다면 그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두 팔을 높이 듦으로 해서 하나님이 어딘가 먼 곳에 계시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장 팔을 내리십시오. 그것은 새 언약이 아닙니다. 그분이 계신 곳으로 여러분의 손을 뻗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 자신을 가리키십시오(에베소서 3:19)
5.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제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그가 떠나고 나면 저는 “주님, 저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관계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간구의 기도를 업신여기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당분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저는 그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 언약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솟구쳐 흐르시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당신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생활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들은 쉽고 단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이 얼마나 지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교회에 오시는 것은, 주일에만 한두 시간 우리와 시간을 보내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오시는 것은 우리와 일주일 내내 계속적인 교제를 즐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한 번 오시면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루 스물 네 시간 그분과 함께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분의 임재를 항상 느끼며 사시기 바랍니다.
6. 주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어떤 종교체계의 구속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것이 자기 안에 영원히 계시는 주님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험은 하루종일 예수님과 아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지만, 반대로 일부러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은 오히려 저에게는 의무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주님과 대화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하면 사람들은 제게 묻습니다. “주님께 말씀드릴 것들을 도대체 일일이 어떻게 찾아 내세요?” 예수님이 우리 맘 속에 오시는 것이 단지 세례나 천년왕국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기 위해서인 줄 아십니까? 천만에요. 그분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고 싶어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다정한 남편이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과 저는 하루종일 대화합니다. 우리는 온갖 것들에 대해 다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도 내용을 들어 보십시오. 해가 거듭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판에 박힌 듯 변할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물론 그 일도 하시지만), 우리가 죄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시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계속 교제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쉽게 거룩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마 “오르띠즈 목사님, 목사님은 어떻게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란 걸 아십니까? 그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생각이거나 혹은 사탄의 소리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또 요한복음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서 인도하시리니....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리라.” 그가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의 약속들은 아무 의미없는 것들이 되어 버립니다.
7. 예수님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속에 하나님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이 공간은 바로 우리의 양심입니다. 신약성경은 ‘양심’이라는 말과 ‘영’이라는 말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나는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노라”(사도행전 23:1)라고 말하고, 또 “성령께서 우리 양심에 증거하여”라고 말합니다. 제가 양심에 관해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압니다. 그러나 ‘영’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낸 사실은 바로 양심이 곧 우리의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양심은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각각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바로 위에서 저는 양심이란 우리들 속에 하나님 자신을 위한 공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곳은 공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곳에 안 계실 때는 당신이 그곳에 무엇을 집어 넣느냐에 따라 온갖 모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양심은 정신보다도 더 빨리 우리들에게 말을 합니다. 정신이 무언가를 이해하기 전에 양심은 이미 우리들에게 “옳다” 혹은 “아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직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속으로 와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면 그분의 영은 우리의 영과 하나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직감을 지배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양심과 정신을 혼합시킨다는데 있습니다. 정신은 양심을 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막는다는 것이지요. 우리들 내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는 것도 성령의 역사를 막는 일입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의 직감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주님이 양심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종교체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라고만 배워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성경이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수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신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내부의 소리에 순종하십시오. 하지만 한 가지 충고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내부의 소리에 확증을 얻기 위해서 믿음의 형제들에게 가서 물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그 주님은 당신의 형제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는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묻는 것은 안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간단하고도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실수를 범하실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 그러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예수께서 여러분 속에서 성령을 통해 인도해 주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걷는 것을 점점 더 배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8. 이끈다는 것은 단지 고백한다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교회에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예수님께는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우리가 그것에 조작을 가하기 전에는 훨씬 쉽고 간단한 것들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생활방식으로 살기로 한다는 것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새롭고 이상한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은 평범한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길입니다. 그것은 모든 우주의 자연법과 아주 잘 조화를 이룹니다. 그것은 대단히 정상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지켰던 가장 복잡한 의식이 십자가에서 끝나 버렸습니다. 오늘날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에게는 아무 복잡한 의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삶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에 있어서 부모들이 신앙고백은 곧잘 하면서도, 어린이들을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이끈다는 것은 단지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제도에만 얽매여 있습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놀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의 영적생활에 잇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일 예배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생활입니다. 사무실과 가정에서의 평일 동안의 생활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내 의도하셨던 바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됨됨이를 닮아 가기보다는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이 가르치셨던 대로 가르친다는 것은 개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을 닮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고린도후서 3:3 “너희는~그리스도의 편지니” 우리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안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읽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종교제도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계획하셨던 대로, 결국 인간은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종교제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의 종교를 폐지해 버릴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9. 건물없는 교회?
우리는 기독교적인 생활이 교회의 집회들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 건물 안에서 하는 행동은 무엇이든지 기독교적 생활입니다. 저는 모임이라든지 건물에 대해서 반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그리스도께서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모임에 간다는 것 자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하나의 통일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교회 건물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쪽의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입니다. 나머지 반쪽의 삶은 우리의 세속적 삶, 가정에서의 삶입니다.
“저는 거의 매일 교회에 나가게 되었어요. 결국 저의 집과 가족을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이제 앞으로는 주일에만 교회에 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자 목사님께서 모든 종류의 간접 충고를 보내오셨어요. ‘오, 주일에만 얼굴을 내미는 자들이여’라는 말씀 같은 거였죠. 그건 제가 보기에 더 이상 다른 모임들에 제가 참석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주일에만 몇 번 더 교회에 나갔다가, 결국 저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그만 두었어요.”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빛이 된다는 것은 당신의 삶의 구조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서 당신이 성직자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우리는 자기 가정의 성직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는 또 친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가정 생활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빛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제일 먼저 빛을 발해야 하는 곳은 가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책임입니다.
(현재의 기독교회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저자의 생각을 부드럽게 전달하는 이의 성품을 통해 기존의 의문에 대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는 기대로 책을 계속 읽고 있습니다. 제게는 대단한 책입니다. 1990년 간행된 책입니다. 2018년 현재 지금 그대로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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