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변함 없는 핵심 자질 8가지) 존 스토트 지음/김명희 옮김 Ivp 출판
제자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원서의 제목인 ‘급진적 제자’(The Radical Disciple)라는 말에 대해 설명해야겠다.
첫째, 왜 제자인가?
그리스도인과 제자는 모두 예수님과의 관계를 내포한다. 그러나 제자가 더 강력한 단어일 것이다. 여기에는 학생과 선생의 관계도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왜 급진적인가?
‘급진적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radical은 뿌리라는 뜻의 라틴어 ‘라딕스’(radix)에서 나왔다. 원래 이 단어는 19세기 정치가 윌리엄 코벳(William Cobbitt)과 극단적인 진보 개혁적 입장을 견지한 이들을 부르는 정치 용어였던 듯하다. 그런데 이로부터 이 단어는 근본적인 문제를 들추어내고 대의에 철저하게 헌신한 이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게 되었다.
보통 우리는 선택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철저한 제자도를 회피한다.
저자는 제자도를 8가지의 핵심적인 자질을 중점으로 설명한다. 그 순서에 따라 책이 만들어져 있다.(불순응, 닮음, 성숙, 창조 세계를 돌봄, 단순한 삶, 균형, 의존, 죽음이 그것이다.)
1장 불순응
급진적 제자의 첫 번째 특성을 불순응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교회는 주변 세상에 대해 이중적인 책임을 진다.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 우리는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둘 다 피해야 한다. 철저하게 주변 문화를 따르지 말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레위기 18:3~4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에스겔11:12
너희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 사방에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하였느니라 (라고 책망하셨다)
마태복음 6:8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외식하는 자와 이방인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그들을 본받지 말라.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그래서 우리가 맞서야 하는 현대의 풍조는 무엇일까?
1. 다원주의의 도전이다. 모든 ~주의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으며 동등한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는 주장을 거부하고 한낱 기독교인의 의견일 뿐인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순진한 오만이라 비난한다. 우리는 지극히 겸손해야 하고, 개인적인 우월감은 조금도 비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은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옹호하는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2. 물질주의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서 가장 물질적인 종교라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질주의적이지는 않다. 물질주의는 영적 삶이 질식당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빌립보서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검소하고, 관대하고, 자족하는 생활방식을 익혀 나가라고 권했다)
디모데전서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3. 윤리적 상대주의 정신이다. 모든 면에서 도덕적인 기준들이 해이해져 가고 있다.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남아 있기나 한지 의문을 품는다. 상대주의가 우리 문화를 잠식했고, 교회로도 침투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윤리적인 결정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성경적인 원리를 적용하는 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토대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다.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우리 삶의 기초다.
순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4. 나르시시즘의 도전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이웃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가. 예수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둘째’ 계명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지만 셋째 계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나.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말세에 나타나는 징표 중 하나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디모데후서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 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다. ‘아가페’ 사랑의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분명 말도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자기 긍정과 자기 부인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창조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게 된 것은 모두 긍정하고, 타락으로 인한 것은 모두 부인해야 한다.
2장 닮음
성경적 기초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다는 의미이며,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영원히 예정된 하나님의 목적이다. 관점은 과거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관점이 바뀌어 현재다)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우리는 모르면서 또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될 것임을 안다. 미래의 관점이다)
신약 성경의 본
1. 우리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 위대한 겸손의 본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임.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우리는 섬김의 삶을 사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 예수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성찬 때 세족식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간혹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명령을 문화적인 상황에 맞게 적용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당시 문화에서 종의 역할을 하였다면, 우리 역시 우리 문화에서 어떤 하찮고 굴욕적인 일도 마다할 수 없다.
요한복음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3.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에베소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4. 우리는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베드로전서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베드로전서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5. 우리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한복음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세가지 실제적인 결과
1. 고난의 신비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만드시는 과정의 일부다.
로마서 8:28~2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복음 전도의 도전
복음을 전도하려는 우리 노력이 종종 실패로 점철되는 이유 중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리 모습이 우리가 선포하는 그리스도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존 풀톤(John Poulton)의 ‘오늘날의 복음 전도’ (A Today Sort of Evangelism)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 소통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이지 말이나 개념이 아니다....진정성은....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전달된다....기본적으로 소통은 진실한 인격으로 가능하다’
3. 성령의 내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분명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다.
3장 성숙
신약 성경의 여러 서신들을 쓴 사도들이 수신자들의 미성숙을 책망하며 성숙을 촉구하고 있다. ‘깊이 없는 성장’은 하나님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고린도전서3:1~3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성숙에 관하여 중요한 질문
1. 성숙의 본질 :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 즉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 부른다. ‘그리스도 안’이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그분과 성숙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성숙이다.
2. 성숙의 종류
가. 신체적 성숙: 건강하게 잘 발달된 신체를 가진
나. 지적 성숙: 훈련된 지성과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가진
다. 도덕적 성숙: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히브리서 5:14)
라. 정서적 성숙: 인간관계를 잘 맺고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인격을 가 진
마. 영적 성숙: 바울의 정의 참조
3. 진정한 성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선하고 참된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 바울이 골로새서 1장의 앞부분, 15절부터 20절에서 정리한 그분의 절대 우월성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십니다(15절)....그분은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먼저 나신 분으로서 권세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주이시자 머리’이십니다(16절) 그분을 통해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또한 그분은 몸 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처음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기에, 만물 가운데 최고의 존재이십니다(18절) 하나님은....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이 자신과 화해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19~20절)
4. 그렇다면 진정한 예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답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이 직접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5. 성숙에 대한 부르심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
바울은 기독교 엘리트주의를 혐오하며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은 단연코 특별한 소수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거기에 이를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먼저 우리 자신이 성숙한 자로 자라고,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선포함으로써 그들도 성숙한 자로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한다.
골로새서 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4장 창조 세계를 돌봄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위해 3가지 기본적인 관계를 세우셨다고 한다.
1. 그분 자신과의 관계
2. 서로와의 관계
3. 그분이 그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신 선한 땅과 피조물들과의 관계
우리는 이 땅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성경은 두 가지 기본적인 선언으로 방향을 제시한다. “땅은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 24:1)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시편 115:16)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셨고 그것이 우리에게 위임되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반대 극단을 피하고 자연과의 더 나은 관계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1. 우리는 자연을 신격화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기 때문에 자연을 존중한다. 하지만 자연을 하나님인 양 경배하지는 않는다.
2. 우리는 자연을 착취하는 반대 극단도 피해야 한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배권은 파괴적인 지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책임있는 청지기가 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다. 문화(창조)명령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연이지만 그 자연으로 우리가 하는 일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생태계의 위기
1. 세계 인구 성장의 가속화
2. 지구 자원의 고갈
3. 쓰레기 처리
4. 기후 변화
5장 단순한 삶
단순한 삶에 대한 복음주의 언약: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대회(1974)와 1980년의 세계복음화를 위한 로잔위원회 신학 및 교육분과 실무 그룹과 세계복음주의연맹 신학위원회 윤리 및 사회분과에서 작성한 선언문
1. 새로운 공동체: 교회가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기준과 새로운 삶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임을 기뻐한다.
2. 개인의 삶: 우리는 어떤 규칙이나 규정도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약 1만 명이 굶어 죽는다는 사실에 비추어 단순한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3. 국제적인 개발: 우리는 인간 개발 계획에 더 관대하게 기부하기로 결단한다. 하지만 정부의 활동도 꼭 필요하다.
4. 정의와 정치: 우리는 현재의 사회적으로 불의한 상황을 하나님이 혐오하시리라 믿으며, 변화가 올 수 있으면 와야 한다고 믿는다.
5. 복음 전도: 우리는 복음화되지 않은 수백만의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단순하게 살라는 부르심은 책임 있는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6. 주님의 재림: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가장 작은 자를 섬김으로써 그분을 섬긴 이들은 구원을 받으리라 믿는다. 구원받는 믿음은 섬기는 사랑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6장 균형
신약 성경 중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가장 다양하고 균형있게 설명하는 본문이 베드로전서 2:1~17이라고 생각한다. 베드로에 따르면 아래의 이것들이 모여 기독교라는 것이 된다.
1. 아기
베드로가 편지의 수신자들을 갓난아기에 비유한 이유는 그들이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 1:23) 거듭남이란 사람의 인격에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깊은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고자 한다면 어떤 젖을 먹어야 하는가? 그것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다.
2. 돌
베드로가 제시하는 두 번째 이미지는 산 돌이다. 교회는 곧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건물의 산 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인 교회, 하나님의 건물의 산 돌들인 교회에 대한 비전을 되찾아야 한다.
3. 제사장
셋째 이미지를 들어, 하나님을 예배할 의무가 있는 거룩한 제사장에 우리를 비유한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과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일이 제사장직에만 엄격하게 제한된 두 가지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사장과 백성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폐지되었다. 이전에 제사장들에게만 제한되었던 특권을 이제 모두가 공유한다. 모두가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교회 전체가 제사장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부름받은 거룩한 제사장이다.
4. 하나님의 백성(베드로전서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여기서 사도는 교회를 한 나라 혹은 백성, 실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혹은 하나님의 소유에 비유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는가? 그리고 왜 우리를 택하시는가? 그것은 편애가 아니라,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5. 거류민(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거류민은 헬라어로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시민권이 없는 이들을 가리키는 반면 나그네는 집이 없는 이들이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다시 태어났으므로 어느 정도는 ‘이 땅의 거류민과 나그네’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두 나라의 시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우선적인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그들은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거룩한 하늘의 ‘시민권’은 종종 오용되어 우리가 세상적인 책임에서 손을 떼는 구실이 되어 버렸다. 다가올 세상의 정의를 약속하면서 현 상태의 불의는 묵인하도록 마약을 투여했다는 면에서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한 말은 항상 틀린 것이 아니었다.
6. 종
베드로의 여섯 번째 이미지는 제자들을 양심적인 하나님의 종들로(베드로전서2:12~17) 제시한다.
7. 균형
이상을 정리하면 성장해야 하는 갓난아기,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산 돌, 예배드려야 하는 거룩한 제사장, 증거해야 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거룩해야 하는 거류민과 나그네, 시민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이는 너무나도 포괄적이고 균형잡힌 그림이다. 이 여섯 가지 의무는 각각 균형을 이루는 세 쌍으로 나눌 수 있다.
가. 우리는 개인적인 제자들로 자라는 일과 공동으로 교제하는 일 둘 다로 부름받는 다.
나. 우리는 예배와 일 둘 다를 하도록 부름받는다.
다. 우리는 순례자와 시민 둘 다로 살아가도록 부름받는다.
우리는 개인적인 제자이면서 교회의 구성원이며, 예배자이면서 증인이며, 순례자이면서 시민이다.
7장 의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미성숙의 표지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 데이지 여사와 흑인 운전사 호크의 심리적 관계가 발전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은 예다. 그러나 우리는 의존이 급진적인 제자가 취할 유일한 태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다시 말해 의존하기보다는 자립하도록 부르심받는 때와 시기가 있다.
요한복음 21:18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와 그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씀은 나이가 들어 가는 일에 폭넓게 적용되는 원리를 담고 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는 자립하는 것이 적절하다 할지라도 나는 급진적인 제자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태도는 의존이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의존의 위엄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은 전적으로 엄마의 보살핌에 의존해야 하는 아기로 태어나셨다. 하지만 그분의 시적 위엄은 결코 잃지 않으셨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축 늘어진 팔다리에 못이 박힌 채 움직일 수 없는, 다시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가 되신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의존이 한 인간에게서 그들의 최고 가치인 위엄을 빼앗지 않으며 빼앗을 수 없음을 배운다.
8장 죽음
근본적으로 성경은 죽음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문으로 본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로마서 6:13)로 묘사한다. 그 원리가 작동되는 여섯가지 다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구원
먼저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죽음과 생명을 본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사는 삶이다(요한 17:3) 하지만 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다. 내적으로는 믿음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세례로, 우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었고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자,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살아 있는 자다
2. 제자도
죽음을 통한 생명이라는 원리는 제자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예수님은 자기 부인을 대가로 진정한 자기 발견을, 죽음을 대가로 진정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3. 선교
죽음을 통한 생명의 원리가 작동하는 셋째 영역은 선교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린도후서4:12)
바울이 선포한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바울 그의 고난과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처럼 구원을 가져올 수는 없다. 이 말은 사람들이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고,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뜻이다. 바울, 그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4. 박해
죽음이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발견하게 되는 넷째 영역은 신체적인 박해다. 이에 대한 탁월한 예는 사도 바울이다. 그는 태형을 당했고, 돌에 맞았고, 감옥에 갇혔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파선했다.
고린도후서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5.순교
1934년에 태어난 루마니아의 기독교 지도자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억압 정권하에서 당국자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 그는 이렇게 반응했다.
"당신의 최대 무기는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6. 유한성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는 다섯 가지 영역을 살펴보았다.
가. 구원에서(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다)
나. 제자도에서(우리가 몸의 잘못된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
다. 선교에서(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가 죽어야 한다)
라. 박해에서(우리가 살기 위해 죽는 것)
마. 순교
이제 여기서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육체적인 몸의 죽음에 직면할 것이다.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공포가 아니다. 죽어가는 과정이 지저분하고 품위를 지키기도 어려우며, 그 다음에 따라오는 부패의 과정도 썩 즐거운 일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한 쪽에 죽음의 패배가 있고, 다른 쪽에는 생명의 선물이 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린도전서15:35)
고린도전서15:35~44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노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더욱이 부활한 몸에 일어난 일은 어떤 면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도 그대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후기: 인사말
나는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책을 읽으라고 강권하고 싶다. 여러분도 읽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강권하라. 이것이야말로 많이 무시되고 있는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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