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독서정리3 성경 이야기로 읽는다 회복

무주이장 2018. 8. 13. 09:10

성경, 이야기로 읽는다. 스티븐 J. 니콜스 지음/전의우 옮김/성서 유니온 출판 


모퉁이를 돌아 희망이 온다 : 회복


힘든 상황을 만날 때, 사방에서 벽이 죄어올 때, 우리는 희망이 필요하다. 반드시 희망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결국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온갖 것에 희망을 건다.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건다. 정치와 정치인에게 희망을 건다. 연금과 은퇴계획에 희망을 건다. 이뤄질 수 없는 일에 희망을 건다. 이러한 잘못된 희망은 이내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변한다. 니체와 샤르트르(실존주의 철학자)는 숱한 사람들이 허망하게 의지하는 헛된 것들에 희망을 걸지 않았다. 이 부분은 이들이 옳았다. 그러나 이들은 희망을 걸 곳을 찾길 포기했다. 이 부분은 이들이 틀렸다. 문제를 제대로 분석했다. 그러나 어디서 해결책을 찾아야할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성경에서 우리는 참 희망을 본다. 더 나아가, 성경적 희망은 현세의 삶ㅇ을 바꿔놓을 만큼 강하고 실재적이다.

천국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지는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2;1~5이 관련된 장과 절이다.


요한계시록 22:1~5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여,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창세기 1~3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은 함께 성경의 두 북엔드를 이룬다.

신학자들은 마지막 때를 말하면서 종말론이라는 단어를 쓴다. 에스카토스(eschatos)라는 헬라어 단어는 '마지막' 또는 '끝'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종말론은 마지막에 관한 연구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마지막 때에 눈을 돌릴 때, 곧바로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보는 온갖 다양한 시각을 들먹인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에 초점을 맞추고, 천국의 삶이라는 굉장한 성경주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흔들리지 않고 집중한다. 숱한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헌신에, 예배에 시간을 집중하게 된다.


마지막 때를 보는 시각을 둘러보자. 20세기 초에 상충하는 두 견해가 널리 퍼졌다. 첫째 견해는 기독교 세계에서 더 진보적인 진영에서 태동한 것으로 이른바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로 통한다. 이 견해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맹위를 떨친 낙관론에 전적으로 기초한다. 또한 이 견해는 독일에서 일어난 사조에도 크게 의존한다. 이러한 진보적인 후천년설은 하나님 나라를 전적으로 이 땅에, 전적으로 현재에 속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마지막 때의 사건들과 하나님 나라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도래가 지금 실현되었다고 본다는 의미에서 이따금 실현된 종말론이라 불린다.이 설은 사회복음운동을 낳기도 했다. 사회복음운동은 죄를 사회악으로 재해석했으며, 따라서 구원을, 기근과 가난과 억압이라는 악을 깨끗이 제거하는 사회적 유토피아의 도래로 재해석했다. 이러한 진보적인 후천년설에 맞서 전천년설(premillennialism)과 세대주의가 일어났다. 천국을 순전히 현재로 보는 대신, 천국을 순전히 미래로 보았다. 후천년설에 공상적 이상주의란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면, 세대주의와 전천년설의 몇몇 유형에는 현실도피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 이러한 현실도피적 시각을 갖는다면, 자신의 삶과 일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 현세의 모든 일이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집중력을 흐리게 하고 방해가 될 뿐이다. 하지만 제3의 길이 있다. 몇 십 년 전 신학자들이 이미/아직(already/not yet)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 견해는 전, 후 천년설 둘을 결합한다. 제3의 길은 현세와 내세 사이의 연속성을 제시한다. 제3의 길은 우리의 삶과 일에서 의미를 찾을 이유도 제시한다. 이미/아직은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 일치의 여지를 둔다. 이미/아직은 우리가 목적과 의미와 비전과 사명을 품고 현세의 삶에 복귀하게 해준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세상에서 해야 할 일과 겪어야 할 어려움을 피해 영원으로 도망치면 안 됩니다.'(본회퍼의 편지 중에서) 부활교리, 미래의 회복교리, 종말교리를 세상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이러한 교리를 오용하는 셈이다. 회복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의 회복에 대한 희망은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내몬다. 우리 발을 지구라는 행성에 단단히 고정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구체적인 몇몇 분문에서 적용해보자.


아모스 9장(심판과 회복의 두 주제가 보인다)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고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보랄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세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과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편 139편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심판과 축복의 미래가 우리 앞에 놓였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베드로는 같은 질문을 이렇게 던진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베드로후서3;11) 베드로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면서 우리에게 일깨운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베드로 후서 3장11절 후단부터 15장까지)


이러한 예언의 메시지는 경종의 역할도 한다. 우리는 메시지를 듣고 영적인 잠과 나태함에서 깨어나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다니엘 선지자는 이것을 잘 알았다. 다니엘서 9장에서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죄가 낳은 결과를 뼈저리게 겪었고, 그래서 무릎을 꿇고 회개했다.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시는지 들린다. 에스겔 선지자는 두툼한 책을 마무리하면서 거대한 성전을 묘사한다. 에스겔 48장처럼, 요한계시록 21장도 한 성을 묘사하고 있다. 이 성을 빛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 성은 우리의 최종 본향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변화의 과정을 밟는다. 한 단계의 영광에서 그 다음 단계의 영광으로 옮겨간다(고린도후서3:18). 그래서 틀림없이,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생각해야 할 게 있고, 살아내야 할 게 있다.


예언본문들을 읽을 때, 희망이라는 큰 그림을 늘 염두에 두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래를 계시하시는 전데적인 이유를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일어날 일을 알길 원하신다. 우리가 실재적이고 변치 않는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어날 일을 알길 원하신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분이 미래를 주관하심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서 쉼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어날 일을 알길 원하신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일하게 하기 위해서다. 창조가 샬롬에 관한 것이고, 타락이 샬롬의 상실과 파괴에 관한 것이라면, 회복은 희망에 관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6을 읽어보라. 끝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보인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 베드로, 바울, 마리아


정적인 인물은 발전하지 않는다. 달라지지도 않는다. 온갖 일을 겪고 온갖 자극을 받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역동적인 인물은 발전하고, 변화하며, 성장한다. 이따금 역동적인 인물을 가리켜 입체적 인물이라고도 한다. 이들이 차원과 복합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으며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베드로와 바울과 마리아의 이야기를 읽어라.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의 영광 : 핵심을 '놓치지 마라'


우리가 여전히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집중하다가 하나님을 놓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비추어 우리의 자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일과 추구하는 바를 비롯해 자신의 삶에서 예레미야 9:24 말씀처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이해하고 안다는 게 드러나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해답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0:39에서 하신 말씀에서 나온다.


예레미야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사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태복음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누가복음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가복음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요한복음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그리스도의 역설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몇 가지 통찰을 제시한다.

1.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강조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관심사가 배제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강조하고 그분의 영광을 강조한다고 해서, 절대로 우리가 짓눌리거나 숨이 막히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강조할 때 우리 날개가 한껏 펼쳐진다.

2. 전치사, 곧 작지만 중요한 단어화 연관이 있다. 첫째는 대신(instead of)와 둘째는 통하여(through)이다. 대신의 방식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의 관심사, 우리의 추구, 우리의 일, 우리의 관계, 우리의 삶 대신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본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수도원주의다.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이처럼 강조하는 것을 통하여라는 방식으로 볼 때, 우리의 관심사, 우리의 추구, 우리의 일, 우리의 관계,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맞아들어 가는지 보인다. 이러한 접근방식을 취할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임을 알게 된다. 대신의 방법, 하나님의 영광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서로 상극이라고 보는 방식은 결코 우리에게 삶의 길라잡이가 되지 못한다.


이야기를 사랑하라 :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일


율법 지키기는 하나님 사랑하기에서 비롯된다. 신명기 11:1은 사랑과 순종의 바른 순서를 말해준다.


신명기11: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하나님을 따르려면, 하나님 사랑하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 순종하기와 하나님 따르기는 하나님 사랑하기에서 비롯된다. 순종하는 삶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1562년 신학교수들이 교리문답을 만들었다. 이 교리문답은 기원이 되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교회의 보물이다. '하이델베르크 1문'이라 불리는 첫 질문은 이렇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변은 한단어로 요약해도 좋겠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복음이다.'

하이데베르크2문 : 당신이 이러한 위로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또 죽으려면 몇 가지를 알아야 합니까?

답: 세 가지입니다. 1.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아야 합니다. 2. 재가 나의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3. 이렇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에 순종하는 문제를 단지 의무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이 부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나 자신이 갈망하는 대상을 예배한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면, 시편 119:97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편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옛 사고방식을 벗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구속적 사고방식을 입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네 단계를 제시해보겠다.

1. 사랑과 관련해 당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 분별이다.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알고 분별력을 기르는 일은 우리가 변화의 길에서 내딛는 첫걸음일 뿐이다.

3. 우리의 마음을 성경으로 채우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의 입의 부끄러운 말이니라. 너의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말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4. 기도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하게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에 대해 배우고 그분에게 듣길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은 단지 느낌이 아니다. 갈망은 기질이다. 느낌은 일어났다가 사그라진다. 그러나 기질은 그대로 남는다. 내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 시편기자와 똑같은 태도를 취하고 시편기자와 똑같이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시편기자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라.

2.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향해 더 깊은 사랑과 더 깊은 갈망을 갖도록 기도하라.

3. 사랑은 느낌에 불과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4.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하신 모든 일을 묵상하라.


이야기를 살아내라 : 성경이 우리를 통해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땅에서 하는 역할이나 목적과 관련이 있으며, 누군가 주장하듯이 깊은 관련이 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문화명령 또는 창조명령이라 부른다.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할뿐더러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이로서, 우리는 단지 창조자의 형상만 지닌 게 아니다. 우리는 구속자의 형상도 지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고, 그분을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이 목표다. 이것이 바울이 즐겨 다룬 주제다. 바울은 특히 고린도후서 3:12~4:6에서 이 주제를 자세히 다룬다.


고린도후서3:12~4: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마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저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에게 자신이 지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세상을 돌보며 일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아담 안에' 있던 우리를 취해 '그리스도 안에' 두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교제하도록 부르신다. 바울이 형상 사역, 복음선포를 어떻게 연결하는지 주목해서 고린도후서 2~5장에서 하는 말에 주목해서 읽어보라. 바울은 고린도후서 몇몇 장에서 우리의 새로운 사명을 두 단어로 압축한다. 우리는 말해야하고 사역해야 한다. 우리의 선포는 우리의 직업과 무관하다. 선포는 성직자드의 전유물이 아니다. 삶과 행동으로 복음을 꾸준히 선포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뚯은 아니다. 우리는 여정 중이며 때로는 가파른 학습곡선을 만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외침으로써 자신의 지상생애와 사역을 간추리신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26절) 자신의 메시아 사명을 이행하면서 하나님과 복음을 충실하게 선포하셨다. 그런 후 덧붙이신다. "(내가) 또 알게 하리니....(요한복음 17:26)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또(계속) 알게 하신단 말인가? 그 대답은 우리다. 그분의 교회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이것을 성육신적 사명이라 부른다. 교회는 미래의 나라, 천국의 삶이 지금 임한 것처럼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5~7장의 윤리를 읽어보라.


우리는 장차 일어날 일을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으며, 용서받았고, 사면받았다. 우리는 참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이것들이 우리가 누군지 말해주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구속자의 형상을 지닌다.


더 깊이 파기 : 다 좋은 얘긴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우리 삶을 해석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시는지 알게 된다. 그분의 말씀을 읽는 게 비결이다. 성경이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내지 못할 때, 우리는 '영적 태만'에 빠진다. 성경에는 우리를 뒤숭숭하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구약성경은 집단학살을 말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파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고 결국 급사했다. 어떤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가혹한 형벌이다.

성경탐구 여정을 위한 몇 가지 기본지침의 제

1. 큰 그림에 주목하라.

2. 문맥에 주목하라.

3. 자신의 삶에 주목하라.

4. 주목하라: 관찰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셀라'라는 단어를 생각하라. 이 단어는 다소 신비롭고 분명한 번역이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단어를 '멈췄다가 읽어라' 또는 '멈추고 묵상하라'라는 뜻일 것이 일거라고 결론 내린다. 그렇게 하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