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성경공부 중 생기는 불순종3 다시 쓰기

무주이장 2018. 6. 20. 13:48

성경공부 중 생기는 불순종3 다시 쓰기


  가르시아 장군의 사례를 들어 영생을 처음 듣고 쓴 글이 영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다시 쓴다.


  나는 영생을 우리들이 죽은 후 천국에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교회 앞에서 갑자기 죽었을 경우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었기 때문이다. 김세윤 교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정리했다. 영생에 관한 신학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글이었다. 이하 그의 글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복음의 전제 중 하나는 ‘하나님의 부왕인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입니다.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땅을 통치하려 하므로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아담의 자기주장 의지를 충동하여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부하고, 그것을 먹으라는 사탄의 말에는 순종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도리어 사탄의 통치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입니다.


  신학은 아담의 교만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내재자원은 유한합니다. 자원의 한계성 즉 결핍성은 사람들에게 모든 형태의 고통을 줍니다. 인간은 영원하지도 무소부재하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늙고, 쇠약해지고,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또한 장소적 제약 속에 같혀있기에 부자유합니다. 아울러 지혜와 능력이 부족해서 불안하고 모든 문제들 속에 빠집니다. 사랑이 부족하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안, 병고, 압제, 빈곤, 갈등, 죽음 등 모든 형태의 고난이 결국 인간의 유한성 곧 결핍성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를 두고 보통 ‘육신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혼과 육신을 구분하는 헬라적 존재론적 이원론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구분하는 히브리적 시간적 이원론을 융합하여 얻은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비롯된 이해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그렇게 이해하면, 구원은 당연히 오는 세상에서 우리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족하고 적절치 못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내세에 우리의 영혼이 안녕을 얻는 것으로서, 생각으로만 아는 것(관념화)이지, 지금 여기서 우리의 고난 해결(인권과 자유, 사회정의와 평화, 빈곤과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등)과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수의 지역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선교는 오로지 구령(救靈)사업에만 집중하고, 인권을 증진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일 따위에는 무관심하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구원은 이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구원은 죽음의 증상들인 고난이 더 이상 없는 온전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금의 우리의 실존을 죽음의 권세 아래 있고 죽음병에 걸린 것이라는 관점에서 말할 때는, 구원을 단순히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 또는 “생명”을 얻는 것이라 말합니다(예: 요5:21-29) 그러나 성경이 지금 우리의 실존을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는 해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말할 때는 구원을 현재적 삶과 구분하여 “영생”이라 합니다.


  긴 글이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전도폭풍 교육 중인 교우들이 말했던 영생이 이렇게 설명된다.

이 영생에 관한 설명이 조금 더 이어진다.


  “영생”이란 원래 히브리어 “오는 세대(세상)의 삶”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은 단지 시간적으로만 끝없이 길어진 영원한 삶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오는 세대” 곧 구원의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란 뜻으로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에 힘입기에 갈등이 없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생이란 현재의 삶속에 있으면서도 인간의 내적 한계성으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오늘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세계에서의 삶의 형태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신학의 설명과 결부되면 더욱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예수님의 복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제 영생은 죽은 후의 삶의 형태가 아니라, 단지 오래도록 산다는 시간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풍요로운 아들로서 어떤 갈등도 없이 사는 현재적 삶의 형태임을 알겠다. 끝.